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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Oct 09. 2024

칠리크랩새우 이야기

제1장_나와의 대화

(2016. 11. 6. 14:32)

칠리크랩 이야기.


맛살의 유통기한에 맞추어

오늘은 꼭 칠리크랩 소스를 사용한 칠리새우 요리를 해야만 했다.


싱가폴에 갔을 때

칠리크랩 소스를 총 3개 샀었다.

그 중 1개가 다른 브랜드의 칠리크랩 소스여서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나는

지난번에 먹어보지 않았던 맛에 도전한다는 느낌으로

그 신선한 브랜드의 칠리크랩 소스로 요리를 하기로 정했다.


그 유명한 칠리크랩의 맛은 사실 내가 느끼기엔

케첩 맛이 전부였는데

이 신선한 소스는 케첩은 셀프로 넣으라고 했다.

무려 200g...

케첩이 없어서 밖에 나가서 큰 사이즈로 사왔는데

도대체 200g 이면 어느정도인걸까

숟가락으로 세 스푼 정도 넣는 느낌이면 괜찮을까 싶어 봤더니 내가 사온 800g 짜리 케첩의 1/4가량을 넣어야 했다....


이 도둑놈들.. 분명 세상물정모르는 호구같은 관광객을 상대로 팔기위해 만들어진 소스임이 분명하단 생각이 들었다. 가격이 기억은 안나지만 이름이 알려진 원조칠리크랩 소스에 버금갈 가격이었을거다 ..


그래도 일단은 먹어보자 라는 마음으로

물을 붓고 소스를 넣고 케챱을 뚜껑열고 쭉쭉 짜서 넣었다. 그리고 비싼 칵테일 새우도 투척, 양파도 투척, 처음 사본 꽃맛살(맛살중에서 비싼 축에 속한다)도 설렘을 안고 투척


보글보글 끓이던 차에

맛이어떨까 간을 봤는데

...

싱가폴 맛이었다 ...


정말 그 싱가폴 특유의 맛

우리나라로 치면 이미 마늘이 기본 소스 곳곳에 스며들어 어떤 재료를 추가로 투입해도 마늘 본연의 맛이 사라질 리 없는 .. 싱가폴인들이 좋아하는 마늘스러운 무언가의 간이 이 소스의 남다른 부분이었던 것 같다.


순간

고민이 되었다.

마지막 단계인 계란을 아직 투척하기 전이었다.

그리하여 아직 기회는 있다. 라는 생각.


다 엎어버릴까.....

각종 재료를 씻었던 망이 보였다.

저 망에다 이 맛없는 걸 쏟아부으면 소스는 빠져나가고 재료는 아직 남을테니까 ...

맛이 이미 검증된 나머지 소스로 새로 시작하는거야


왠지 이 경험이 무척 값진 고민을 하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사회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한창 진행하면서 비용도 많이 투입되어버린 그런 상황에

사실은 처음부터 무언가가 잘못되어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한가지 잘못된 점때문에 완성 이후의 모습도 애초에 계획했던 모습과 상당히 다를거라는 확신이 드는 시점. 이미 투여된 시간과 비용이 상당한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무척 어려운 일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과감하게 일을 엎지 못하고 이미 망친 일인것을 알면서도 그냥 그대로 진행해버리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겠다 라는 깨달음이 잠깐 ...


나역시도 케첩이 그 특유의 맛을 가려줄까 싶어(매우 수돗물의 소독약 같은 맛이다) 좀더 쭉쭉 짜보고는 애써 나의 미각을 설득시키며(이정도면 먹을만은 한거같아!) 그대로 음식을 완성시키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계란을 주욱 끼얹고 나니

이제는 정말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


완성된 요리를 한그릇 크게 떴다.

식탁에 앉아서 오늘이 주일이니 설교를 들어야겠다

는 생각으로 설교도 틀고

맛살을 한입.

...


이게뭐지...

분명 아까 요리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던

'이 정도면 크게 거슬리지 않아. 괜찮아 먹을만 해'

라는 자기암시무안하리만치

이 싱가폴 맛은 심히

거 슬 렸 다 ...


심각하게 자기존재감이 강렬한 싱가폴 맛에 미각이 농락당하느라 설교말씀이 귀에 안들어왔다.

마귀의 방해는 이런식으로도 올 수가 있는건가

아니면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건가

부질없는 생각이 두둥실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비싼 칵테일 새우만

그 처참한 맛의 카오스 속에서

살아있는 질감을 안타깝게 뽐내고 있었다 ... 쓰읍


맛살은 생으로 먹는 것이 가장 맛살다움을 살릴 수 있는 요리법이라는 깨달음도..


이미 오염된 소스에 맛살 본연의 '맛있음'을 모조리 흡수당한 맛살은 혼돈의 카오스에 소름끼치는 질감을 추가해주었다 ... 아무런 맛이 안나는 맛살은 마치 곤약이랄까 아무맛이 안나는 어묵이랄까 아무튼 맛이 안나는 맛살의 식감은 꽤나 끔찍한 거구나 라는걸 알았다.


정말 실패란 값지다 ...


일단 새우만 쏙쏙 골라먹고 일어났다.

이제 칠리크랩은 정말 내 인생에서 자리털고 일어나주어도 될 것 같다.


징글징글한 마음으로

그 맛없는 향을 아직 뜨겁게 내뿜고 있는 냄비를

엎 었 다 ...


이제는 모든 환상이 깨진 꽃맛살과

아까운 재료의 신선함이 빠진 칵테일새우

나에게 돌아올 수 없는 요리를 완성하게 만든 계란의 잔해들..

이 남았다 ...


과감히 하나 남았던 원조칠리크랩 소스를 뜯었다.

물붓고 소스붓고 기름붓고

끓기도 전에

생존한 실패작의 잔해들을 부었다


보글보글보글보글 ..

한 그릇 다시 떴다.

이번엔 먹을 수 있었다.

재료와 소스가 따로 노는 느낌이었지만.


전에 만들었던 칠리새우가 무척 잘 만든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 괜히 눈물이 난다 ㅜ

그땐 새우가 참 부실했었는데 ...


아무튼 이 요리를 함께 먹어줄 가족에겐 아무말 말아야지... 괜히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면 더 맛이 없게 느껴질 것 같다 ...


먹었는데 힘이없다

그래도 설거지는 해야지 ... 또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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