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의 이사, 그리고 집.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곳.

by 다정한 지혜씨

서울에서 부천으로 내려온 뒤 일곱 번 이사를 했다. 나아지지 않는 형편에 이사를 할 때마다 집은 점점 작아졌지만 이상하게도 살림살이는 더 늘어갔다. 부천에서 첫 번째로 살았던 집은 화장실과 부엌이 밖에 있는 방 하나짜리 작은 원룸이었다. 그곳엔 처음 보는 벌레들이 많았고 그것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매번 소리를 질러댔다. 다리가 두 개 이상인 것들이 참 부지런히 도 나타났다 사라졌다. 당시 자주 출몰했던 벌레로는 집게벌레부터 콩벌레, 바퀴벌레 등이 있었고 난 세상 모든 벌레들이 우리 집에서 사는 줄로만 알았다. 그 녀석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제 집인 듯 순간순간 얼굴을 디밀었고 나는 그때마다 각종 물건들로 그것들을 때려잡느라 매번 사활을 걸어야만 했다.


그곳은 집이라곤 하기엔 너무 작은 방 한 칸 자리 공간이었다. 서울에서 대궐 같은 집에서 살다가 내려온 첫 번째 보금자리는 기어코 아홉 살 어린 내 마음에 병을 만들었다. 한동안 폐쇄공포증에 걸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엔 항상 현관문을 열어두어야만 했다. 그러다 잠이 들면 엄마의 퇴근 시간까지 일어나지 못했는데 그때마다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곤히 자고 있는 딸을 마주쳤을 때 엄마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나는 그쯤 폐쇄공포증을 비롯해 몽유병과 공황장애까지 걸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낮에는 꽉 막힌 공간에 혼자 있을 수가 없었고 밤에는 자다가 뛰쳐나가거나 아니면 발작을 일으켰다.


엄마, 아빠는 상태가 점점 나아지지 않고 심해지는 나를 보며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일 년이 막 지날 무렵 서둘러 두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두 번째 집은 그나마 첫 번째 집보다는 넓었다. 방이 두 개였고 심지어 화장실도 집안에 있었다. 부엌은 여전히 밖에 있었지만 그래도 난 그곳에 정을 붙이려고 애를 썼다. 우리 집은 일층에 주인집을 지나야 있는 이층에 자리 잡고 있었고 현관으로 들어가려면 낡아빠진 철제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다. 철제계단을 오를 때마다 곳곳이 삭아서 나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 계단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내가 사는 동안에는 무너지지 않았다.


두 번째 집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던 해에 세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갔다. 여전히 위층에 주인집이 사는 셋방살이였지만 방이 두 개에 거실도 컸고 무엇보다 부엌과 화장실이 집안에 있었다. 세 번째 집은 서울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전세로 얻은 집으로 아늑하고 편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행차를 하신 것이다. 아주머니는 곧 시집간 딸이 들어와서 살기로 했다며 다음 달까지는 집을 구해서 나가라는 소리를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네 번째 집인 오 층짜리 단독 빌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리 집은 삼층이었는고 계단이 거의 없던 집에 살다가 갑자기 생긴 수많은 계단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한동안 힘들어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네 번째 집은 차도 바로 앞이라 좀 시끄럽긴 했지만 나름 넓었고 버스정류장과 시장이 가까이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 그리 싫지 않았다. 이년 뒤 전세계약이 끝나는 날 우리는 미련 없이 다섯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다섯 번째 집은 난방이 잘 되지 않아 너무 추웠고 매우 시끄러웠다. 겨울에 자려고 누우면 입김이 하얗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우리 집은 이층이었고 일층에는 카센터가 있었다. 소음의 정체는 집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과 일층 카센터의 대형 스피커였다. 온 동네가 울릴 만큼 음악을 크게 틀고 영업을 하는 카센터 때문에 귀에는 이명까지 생겼다. 둥둥둥, 거리는 소리가 학교까지 쫓아와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도중 드디어 카센터가 부동산으로 바뀌는 날, 그제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이곳에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후에는 본의 아니게 술자리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유일하게 출입문이 두 곳이었던 다섯 번째 집의 장점을 활용해 후문으로 몰래 들어가곤 했다. 대학교 일 학년을 마친 후 나는 이곳에서 할아버지를 떠나보냈다. 할아버지는 일 년 정도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눈을 감으셨다. 조용하지만 가장 슬픈 이별이었다. 나를 키워주시고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건 심장을 도려내는 일과 같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와 나는 여섯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여섯 번째 집은 살면서 제일 거지 같은 집이었다. 여자 둘이 급하게 얻은 집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첫 번째 집에서 만났던 벌레친구들과 다시 조우했다. 이 집은 좁기도 좁은 데다 학원가 근처 일층에 있어서 시끄럽기도 했고 교복 입은 학생들이 숨어 들어와 담배를 피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매일 아침 수북이 쌓인 집 앞에 담배꽁초를 보고 경고문을 붙이고 악을 써봤지만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그러던 재계약을 세 달 앞둔 어느 날 임대 아파트 당첨 소식을 듣게 되었고 더 이상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되는 현실에 할머니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렇게 우리는 일곱 번째 집을 향한 마지막 이사를 했다.


일곱 번째 집은 부천 여월동에 있는 임대아파트로 깨끗하고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창문 새시가 있는 튼튼하고 조용한 집이었다. 그곳엔 웃풍이라곤 없었고 그 흔한 바퀴벌레도 없었다.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너무도 고요한 집에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어려웠지만 서서히 적응해 갔다. 할머니와 이 집에서 봄이면 떨어지는 벚꽃을 보고 여름이면 맞바람 치게 양쪽 큰 창을 열어두고 가을이면 장이서는 아파트 내에서 닭꼬치를 사 먹고 겨울이면 눈 쌓인 공원을 함께 걸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할머니가 이 집을 떠나 요양원을 가시던 날 이곳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에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했던 게 생각이 난다. 집이라는 존재가 어쩌면 나에겐 그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서울에서 부천으로 내려와 처음 살았던 작은 원룸부터 원종동 빌라까지 부천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긋지긋한 이사를 통해 제집 없는 서러움과 동시에 이삿짐을 빠르게 싸고 푸는 법을 배웠다. 집이란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데 과연 나에게도 그런 의미였나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나에게 집이란,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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