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요리생활
동생 이름이 적힌 박스 하나가 택배로 왔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거다. 누구의 엄마라고 평생 불린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앞에 내세우는 것을 쑥스러워한다. 그래서 시골에서 출하하는 농작물에도 같이 살지 않는 동생의 이름을 쓴다. 박스는 행여나 터질세라 열린 부분은 모두 꼼꼼하게 테이프로 싸맸다. 테이프를 하나씩 깔끔하게 떼어내는 일은 번거롭지만 그걸 귀찮다고 여길 일은 아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렇다.
박스를 열자 신문으로 둘둘 쌓인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좀 무거운 것은 김장용으로 재배하던 무 3개, 가벼운 것은 직접 키우고 말린 태양초 고춧가루다. 이 택배가 오게 된 것은 순전히 고춧가루 때문인데 지난번 시골 갔을 때 바리바리 챙겨 온 여러 식재료 가운데 유일하게 빠트리고 온 것이었다. 시골 어머니들은 본인이 보유(!)하고 있는 식재료를 서울 있는 자식들이 사 먹었다고 할 때 안타까워하는 경향이 있다. 고춧가루가 똑 떨어져서 사 먹었다는 지나가는 말에 마음이 쓰였나 보다. 그런데 고춧가루만 달랑 보낼 수 있나. 박스 하나를 마련하고 그 박스가 가득 찰 때까지 이것저것 넣었다. 벌써 늙은 호박이 되었을 계절이 지났는데도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호박이 있었는지 작고 단단한 호박도 두 개 들어 있었다. 비닐봉지에는 오래 보존하라며 일부러 까지 않은 마늘이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바닥에는 감자와 양파가 알알이 깔려 있었다. 김장용으로 재배한 배추 세 포기는 신문지를 벗기자 파릇파릇한 자태를 드러냈다.
소중한 고춧가루는 냉장고에 잘 갈무리해 두었다. 무, 감자, 양파, 마늘, 호박은 당분간 두어도 되니 다용도실에 보관했다. 배추가 문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해 보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진딧물이 먼지처럼 소복하게 붙어 있었다. 늦가을 이상 고온이 진딧물의 창궐을 막지 못한 것 같았다. 진딧물도 같은 고향 출신이라 반가웠지만(!) 그대로 두었다가는 어머니가 애써 키운 배추를 다 뺏길 판이었다. 긴급한 조치가 필요했다. 김장김치도 있고 동네 주민이 주신 배추도 만든 겉절이도 있어서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배추물김치였다.
일단 배추를 씻었다. 몇 번을 헹궈도 끈질긴 진딧물이 계속 나왔다. 아내는 기겁을 하고 진작에 도망쳤고 나는 이 전투에서 이겨야 했다. 헹구는 것만으로 부족해 배춧잎을 하나씩 열어 가면서 씻어내기를 다섯 번 정도는 했을까. 이제는 없다고 판단하고 반으로 가른 배추를 소금에 절였다.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풀을 쑤는 일이다. 오랜만에 밀가루 대신 쌀풀을 쑤기로 하고 믹서기에 쌀을 곱게 갈았다. 물 4리터 소금 40그램을 넣어 염도를 1.0 정도로 맞췄다. 침대만 과학이 아니라 요리도 과학이다. 오히려 더 과학적이다. 암튼 어머니는 대충 감으로 하는 걸 염도계가 있어야 나는 할 수 있다. 쌀가루를 넣고 잘 저어주면서 걸쭉하게 끓인 다음 식혀 놓는다. 무는 나박 썰기를 하고 양파, 당근은 채 썬다. 매운맛을 살짝 더할 청양고추도 종종 썬다. 마늘을 많이 쓰는 편이다. 잘 빻는다. 이 모든 부재료를 잘 섞어둔다.
서너 시간 지나서 배추가 다 절여졌다. 한 번 씻었더니 진딧물이 또 나와 다시 한번 헹궜다. 뻣뻣하기만 하다 이제 제법 유연해진 배추와 부재료를 켜켜이 쌓는다. 그 위로 한 김 식혀 체온과 비슷해진 우윳빛깔 쌀풀을 붓는다. 화룡점정의 순간이다. 살짝 뜨거운 기운과 함께 채소들이 어우러진 맛있는 냄새가 올라온다. 이제 실온에 며칠 두면 잘 삭아서 시원한 배추물김치가 될 것이다. 어머니 손맛을 따라갈 순 없지만 배운 대로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아빠의 손맛을 갖게 될 것이다.
배추 따라 실려온 진딧물 덕에 택배박스의 여정은 배추물김치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