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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Aug 10. 2023

아빠, 빨리 김치 좀…

그 남자의 요리 생활

우리집엔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사람이 하나 있다. 매 끼니 김치가 있으면 제일 좋고 김치가 없다면 김치와 유사성이 높은 채소무침류라도 있어야 한다. 김치가 있으나 없으나 밥 먹는 데 크게 지장을 받지 않은 다른 세 사람과 달리 큰 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바람직한(!) 식성을 갖고 있다. 육류보다는 채소 반찬을 더 좋아하고 햄버거, 피자, 햄에는 관심이 없다. 학원 수업 중간에 혼자 밖에서 밥을 사 먹을 때도 콩나물국밥, 소고기국밥, 순대국밥, 설렁탕 같은 걸 골라서 먹지 패스트푸드 식당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식성과 성별이 크게 상관은 없지만 흔한 고정관념을 잣대로 들이대면 남학생처럼 먹는다. 이 아이가 밖에서 음식을 먹을 때 식당을 평가하면서 꼭 빠지지 않는 요소가 김치다. 이 집은 김치가 맛있고 저 집은 깍두기가 아쉽다는 식으로 김치에 대한 뚜렷한 주관을 표현한다. 요리와 음식을 좋아하고 섬세한 감각을 추구하는 아빠의 영향인가 싶은데 김치에 관해서는 나보다는 더 까다롭고 수가 높다.


바깥 음식보다는 집밥을 훨씬 좋아하는 이 아이의 매 끼니를 챙기는 일은 김치만 있다면 어렵지 않다. 일단 기본 반찬으로 김치를 깔기만 하면 되니까 반찬 걱정 하나는 덜 수 있으니까. 가을걷이한 곡식이 떨어져서 먹을 것이 없는 춘궁기가 있었던 것처럼 초겨울에 담근 김장김치가 끝을 보이기 시작하는 한 여름은 하궁기인 셈이다. 더구나 우리집에 따로 김치냉장고가 없이 시골 엄마가 만든 김장김치를 시골집에서 한두 통씩 갖다 먹는다. 김치찌개나 김치전을 왕창 해먹은 뒤에 한 동안 본가에 내려가지 않으면 김치가 떨어진다. 김치 귀신이 매우 예민해지는데 수험생은 진상의 면죄부를 받은 사람이라 어떻게 해서든 잘 달래는 수밖에 없다. 할머니 김장김치가 바닥을 드러내자 낼모레 성인이 되는 아이는 김치류라면 뭐라도 내놓으라고 성화다. 그래 우리는 일시적으로 수험생의 부모이니까 이 사태(!)를 힘을 모아 슬기롭게 헤쳐나가기로 했다.


냉장고가 크지 않은 우리집은 가능하면 가까운 시장에서 하루 이틀 안에 소진할 식재료를 산다. 아내는 작은 가방을 메고 동네 시장 채소가게에서 배추 한 통을 샀다. 세 통에 1만 원인데 한 통은 5천 원이라 고민했지만 이 더운 여름에 그걸 짊어지고 오는 건 아무래도 끔찍해서 하나만 가방에 담았다. 배추 사놨으니 김치는 네가 담그라는 톡이 아내한테서 왔다. 그래 그건 내 몫이지. 퇴근과 동시에 여름김치를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 부쳤다. 배추 한 장 뜯어서 먹어보니 여름이라 그런지 배추맛이 겨울배추만 못했다. 그래도 도리 없지. 양념맛으로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 이 뜨거운 여름에 신선한 채소가 식탁 위로 올라온 것만 해도 어딘가.


배추를 거꾸로 들고 칼로 반을 가른다. 칼집을 따라 벌리면 쩍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난다. 세로로 4 등분한 다음 뿌리와 닿은  심은 사선으로 정교하게 잘라낸다. 아삭한 부분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살려보려고 애를 쓴다. 가로로 자르지 않고 세로로 대략 3등분 정도 한다. 이렇게 가늘고 길게 자르면 아삭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맛볼 수 있어서 좋다. 김치를 결대로 찢어 먹어야 맛있다고 엄마들이 말하지 않는가. 굵은 소금 툭툭 뿌려서 절여 둔다. 숨이 적당히 죽으려면 1시간 정도는 둬야 된다.


그 사이 양념을 만든다. 산뜻하게 먹을 여름김치는 겉절이와 경계가 흐릿하다. 풀은 쑤지 않는다. 덥기도 하고. 엄마 농장에서 올라온 태양초 고춧가루, 강화도 외포리 젓갈시장에서 사 온 추젓, 남해 처고모가 보내주신 까나리액젓, 알이 통통한 마늘을 다진 것, 설탕 조금이면 충분하다. 만든 이를 아는 식재료를 대할 때는 늘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이 정도 양념으로 김치가 될까 싶지만, 된다. 이 모든 재료를 잘 섞어서 양념을 만들어 둔다.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고춧가루도 불어서 색이 짙어진다. 그다음은 일사천리.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흘린 눈물(!)을 따라내고 양념을 넣고 골고루 잘 섞는다. 그 자리에서 바로 먹어도 먹을 만은 하지만 겉절이 같은 김치라도 김치는 김치니까 하루 정도는 실온에 둔다. 살짝 신맛이 올라오면  엄마 협찬, 아빠표 여름김치가 완성된다.


아내와 나의 재빠른 공조로 김치 귀신 수험생의 김치 투정은 잠시 잠재웠다. 김치 먹는 속도를 보니 다음번엔 무거워도 세 통을 사야 할 것 같다. 그때 그 여름 엄빠가 만들어 준 김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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