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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Jan 02. 2022

잔치국수 한 그릇


올해로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딸은 일요일에도 학원을 간다. 제대로 공부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쉬어야 하는 날에도 공부를 한다고 애쓰는 걸 보면 짠하기까지 하다. 학원을 다니지 않으면 공부를 못하겠나 싶지만 25년도 더 넘은 옛날 이야기를 하면 애비, 애미의 꼰대지수만 더 높아질 뿐이라 그저 학원비를 묵묵하게 내고 무관심으로써 은근한 지지를 표명한다.

열두 시쯤에 학원엘 간 고딩은 두 시 쯤에 돌아오면서 엄마한테 잔치국수를 예약한다.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딱 맞춰서 먹을 수 있게 해달라는 멘트도 잊지 않는다. 공부하는 게 뭔 벼슬이라고 유세냐 싶지만 생각과 동시에 우리 부부는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내는 어제 정성스레 우려 둔 멸치육수를 충분히 덜어서 데우기 시작했다. 면은 아내가 삶기로 했다. 큰 냄비에 물을 넉넉히 채우지 못하는 건 불치병이다. 검소한 아내는 면 삶는 물도 아끼는 듯하다. 팔팔 끓는 물에 가는 소면을 1인분보다 조금 더 넉넉히 넣고 삶는다. 모자라는 것보다 남는 게 낫다. 아이가 다 못 먹는다고 물리면 특급 잔반처리 휴먼이 대기하고 있으니 걱정없다. 믿는 구석이 있으면 소면 넣는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다.

조금 더 정교한 기술과 칼질이 필요한 고명은 늘 내 차지다. 육수만 잘 내면 잔치국수는 특별한 고명없이 든든하다. 하지만 자식 앞에 한없는 노예근성을 가진 애비는 이왕이면 모양도 좋고 맛도 더 좋게 해주고 싶다. 계란 두 개를 흰자와 노른자로 분리했다. 잘 섞은 다음 약한 불에 얇게 부쳐 지단을 만든다. 지단이 익어서 굳어버리기 전에 고른 두께로 얇게 펴는 게 중요하다. 그게 기술이다. 그 다음은 불조절인데 너무 센불로 하지 않으면서 태우지 않아야 한다. 예전에 윤식당에서 윤여정 배우가 흰자 지단을 부치면서 "안밤색, 안밤색"을 외쳤는데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안밤색'을 부르짖고 있더라. 하얀색이어야 할 지단이 밤색이 되면 그만한 낭패가 없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기술은 잘 뒤집는 것. 긴 젓가락을 가운데로 잘 밀어 넣은 다음 반으로 접힌 채 들어 올렸다가 반대로 뒤집는 기술이 일반적인데, 불조절을 잘 하고 참을성만 있다면 뒤집개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자신의 기술을 믿고 머뭇거리지만 않으면 된다. 타이밍이 중요한 요리 기술에서 망치는 이유는 대부분 스스로를 믿지 못해 머뭇거리기 때문이다. 망치면 어때? 어차피 피해자는 나 자신이나 가족인 걸...

잘 부친 지단은 도마 뒤에 올려 놓고 좀 식혀야 한다. 뜨거운 상태에서 접어서 썰면 단면이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칼날에 눌린 다음 썰린다. 아주 잘 벼린 칼로 섬세한 동작으로 썰면 모를까 일반적인 가정용 식도로는 바스라지기 일쑤다. 칼을 탓하지 말고 자신의 부족한 참을성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지근하게 식은 상태에서는 조금 무딘 칼이라도 잘 썰린다. 어차피 계란 지단은 온기가 중요한 음식이 아니다.

국수 이야기를 하다가 계란 지단에 이렇게 공들일 줄 몰랐네. 사실 잔치국수 만들 때 제일 많이 공들여서 그렇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고 싶은 그런 심리다.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파도 썰어 두었다. 아내는 대파 정도는 필요없고 아이가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입장인데 나는 그 반대를 반대한다. 채썬 대파 얼마 들어가지는 않지만 그 대파가 있고 없고에 따라 잔치국수의 전체적인 맛과 균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파 써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그 사이 잘 익은 국수는 찬물에 헹궈 건졌다.면기에 예쁘게 담고 육수를 붓는다. 북어대가리까지 넣어 우린 육수의 향이 좋다. 하얀 지단, 노란 지단까지 올리고 채선 대파를 훅 던진다. 과도한 김가루를 모든 음식을 김요리로 만들지만 적당히 넣어주면 조미김 특유의 감칠맛이 국수에 더해진다. MSG여 영원하라.

잘 익은 김장김치와 양념장까지 곁들이면 애비, 애미가 최선을 다한 잔치국수 한 상이 완성된다. 양이 좀 많은가 싶었는데 배가 고팠는지 국물까지 싹 비우는 걸 보니 노예들은 그저 행복하다. 내 새끼 입으로 음식 들어갈 때 아니냐. 본인이 겨우 5분 만에 뚝딱한 잔치국수한 그릇에 애비, 애미의 정성이 이만큼 들어갔다는 걸 언젠가는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글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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