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보통은 공원을 걷거나 시간이 넉넉지 않을 때는 직장에서 쉰다. 오늘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집에 잠시 들렀다. 요즘 들어집에 있는 시간이 좋다. 집을 사랑한다. 그렇다고 매일 쓸고 닦고 꾸미는 것도 아니다. 이 시간이어야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정적이 있다.커피 한 잔 내려 그냥 멍하니 앉아만있어도 좋다. 쓰다만 글을 꺼내 끄적인다. 장소를 바꿔서 적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문장이나 뜻밖의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오늘처럼.
남편은 출장 중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렀다. 음식 사진을 찍어보냈다. 마침 나도 쉬고 있던 중이라 지금 상황을 보고 했다.집에 있고 싶다(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강렬한 메시지였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겠지.알아도모르는 척 다른 말로 회피하는 남편이다.안다. 누가 등 떠밀어 나가라 했나 자발적으로 일한 지 어느덧 8년째다. 이젠 어쩔 수 없다는 표현도 맞다.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하트 이모티콘 아래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나는 언제 그만둘지 모르니 남편보고는 열심히 일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우리 서방 일하면서 좋은데 많이 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야 해
커피 한잔을 다 못 마시고 일어나야 했다(양이 많다)삼십 분이라도 오고 싶었다. 그만큼 집에 있고 싶은 갈망이 컸던 걸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쓰고 싶었던 건지도.
양치질을 하고 있던 중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난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단 한 사람 백 프로 친정엄마인 줄 알았다.빨래나 설거지가 없어도매일 우리 집에 출근도장을 찍는다. 얼굴 보고 갈 수 있겠구나 했다. 문을 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시어머니였다. 이제는 어머니 얼굴만 봐도 글감이라는 확신에 웃음이 난다. 언제부터 어머니에게 이렇게 관심이 있었던가 싶다. 사돈 계시면 보고 갈라했더니 내가 있었다며 더 놀라는 건 시어머니였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참기름과 총각김치다. 이번엔 내가 더 놀랐다. 며칠 전 우리 집에 들렀을 때 참기름이 없다며 가져와야겠다 하신 건 알았는데 갑자기 총각김치등장에 눈이 커졌다.전 날친정엄마한테 집에 총각김치 있냐고 전화를 했었다. 저녁을 먹던 중큰 아이가 그 많은 김치종류 중에 총각김치를 꼬집어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시어머니의 가방에서 나오는것이 아닌가. 어머니와 같은 동에 사는 친구가 총각김치를 주더란다. 냄새를 맡아보니우리 며느리가 딱 좋아할 맛든 김치라며 챙겨 오신 거다. 이런 게 우연일까 필연일까.
급하다. 2시까지 다시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어머니 저 먼저 가요" 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섰다. 먼가 순서가 바뀐 것 같지만 이 상황마저 우습다.
만약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어머니가수시로 낮에 오셨다면 지금처럼 편하게 맞이할 수 있었을까?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마음을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됐을까? 반대였다면 아찔할 수도 있겠다. 불만이 쌓였을것 같다.
현재 직장을 나가는 상황에서 언제든 오시는 건부담이 없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어머니의 등장이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어머니를 대하는 내 마음이 당당할 수 있어서 편한 거다. 불시에 오시기에 바쁘게 청소할 시간도 없다.있는 그대로 보여도 된다. 그래도 뭐라 한 적 단 한 번도 없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적다 보니 어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다니나하는 생각도 든다.남편에게 집에 있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조차 움찔해진다.
어머니는 내 마음과 상관없이 한결같이잘해준다. 남편 혼자 고생시키면 안 될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신경이 나만 쓰일 뿐. 차라리 어머니가 나를 막(?) 대했다면 이런 생각도 안 했을 것 같다. 어머니는 고단수다. 저 멀리 내다보고 있는 것 같다.편한데 마음이 쓰인다. 그래서 시어머니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