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학원에 강의를 나가다 보면 종종 내가 학생인지 선생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나는 분명 칠판 앞에 서 있다.
하지만 저마다의 인생 서사를 품은 이분들 앞에서는 오히려 내가 인생 수업을 듣는 학생이 된다.
간호학원은 1년짜리 과정이다.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4시까지 수업. 그리고 이론 740시간. 실습 780시간.
한마디로 '배움의 근육통'을 느끼기 딱 좋은 구조다. 그럼에도 교실 문이 열릴 때마다 누군가는 분주한 아침의 흔적을. 또 누군가는 가족의 기운을 등에 지고 들어온다. 대부분 40~50대 주부들. 아침엔 밥을 짓고 점심엔 공부를 하고 저녁엔 다시 가족을 챙긴다. 집안일과 공부를 함께 해낸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그야말로 '일상의 철인 3종 경기'다.
그런데 말이다. 이 철인들 중에도 특히 '아이언맨'을 뛰어넘는 분들이 있다.
지난주엔 한 학생이 시험이 끝났다며 활짝 웃었다.
" 이제 간호조무사 시험 준비에 집중하려고요."
" 시험이라니. 무슨 시험이에요?"
" 방통대 사회복지학과 다니고 있거든요. 기말고사 봤어요. 그리고 지금 보험 공부도 같이 하고 있어요."
"(우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분은 50대였는데 세 가지 공부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
"그냥 시간이 아까워서요."
혼자도 아니고 엄마라는 무거운 역할까지 감당하면서도 이렇게 치열하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니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나도 늘 분주하게 살지만, 그 진심 어린 노력 앞에서는 내가 더 단단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다시 간호조무사에 도전하는 분들도 많다. 이미 한 번 공부의 고비를 넘어본 분들이라 다시 그 길을 오르는 게 어떤 고단함인지 너무 잘 안다. 그래도 또 걷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것. 그 마음이 또다시 새로운 배움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계속 도전하는 분들을 보면 그 어떤 자기 계발서 보다 더 큰 울림을 느낀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에 공인중개사 자격증까지 따고 간호조무사에 도전하는 67세 할머니도 있었다. 그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셨다.
" 예전에 일본에서도 요양보호사로 일한 적이 있어요. 돌이켜보면 그때가 정말 보람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불현듯 '삶의 곡선'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생각하는 직선적 인생이 아니라 이분들에겐 공부와 일이 고리처럼 이어진 원형이다.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다시 시작이 열린다.
새벽마다 수영을 하고 학원에 오시는 71세 할머니도 있었다. 이 분은 몸매도 피부도 나이를 잊게 할 만큼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마음가짐에서도 '연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틈이 없었다.
"자격증을 따면 산후조리원 열 거예요."
그 한마디가 그렇게 가볍고 경쾌하게 들릴 줄은 미처 몰랐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큰 결심이 필요하고 마음 한구석에 부담까지 안겨주는 말일 텐데. 이분에게는 마치 아침 운동을 계획하듯 자연스러운 일과처럼 들렸다.
도전이라는 단어가 어떤 이에게는 높은 벽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도전은 숨을 고르고 한 번 더 발을 내딛는 일상의 리듬처럼 스며 있다. 그분들의 당당함과 밝은 기운을 보면 도전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의 여유와 힘이 느껴진다.
또 한 분은 65세 할머니다. 이 분은 거의 '인생 컬렉션'을 소유하고 계신다. 연극, 무역, 심리상담, 요리, 바리스타, 사회복지학, 시니어 모델 등. 그리고 지금은 간호학원과 사이버대학 심리학과를 동시에 하고 있다.
이 분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공부가 제일 돈이 안 들어서 계속하게 된다."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
친구들이 백화점에서 500만 원짜리 냄비 세트를 살 때, 이 분은 새로운 전공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삶을 공부로 채우는 사람. 그건 어쩌면 가장 '럭셔리한' 인생의 형태 아닐까.
수업을 마치고 텅 빈 교실의 불을 끄며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친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라며 온갖 뉴스가 위기만을 말하지만 이 작은 교실 안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다. 배움의 생명력은 여전히 뜨겁고, 어떤 날은 숨을 쉴 정도로 생생하다.
누군가는 새 생명을 품지 못해 한숨짓지만 누군가는 이곳에서 새로운 ‘나’를 계속 만들어낸다. 중년의 어깨와 노년의 미소에 젊음보다 더 단단한 성장이 빛난다.
이분들을 보면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선택한 교실이 만든 각자의 ‘학번’ 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아직 자기 인생의 다음 학기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이다.
포기하지 않는 한 꿈은 나이를 기다리지 않고 언제든 다시 피어나며 언제든 다시 이어진다. 이 말들은 교실 밖에서는 흔한 슬로건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안에서는 매일 새롭게 갱신되는 ‘현장 보고서’이다.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기록하는 살아 있는 증거다.
생각의 범위를 넓히면 우리의 인생도 함께 확장된다.
배움은 더 넓게 더 크게 더 새롭게 우리를 이끌어준다.
그리고 이 교실은 오늘도 또 한 사람의 내일을 조용히 밝히고 있다.
이민규 작가가 말했듯,
“우리의 생각은 행동을 결정하고, 행동은 운명을 결정한다.”
오늘 나는 나를 이렇게 규정해 본다.
“나도 멈추지 않고 계속 배울 사람이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