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다르지만 묘하게 닮았다
대학병원 간호사 출신. 현재 찜질방 여탕 수리공. (이 문장만 보면 인생이 일직선이 아니라는 걸 강력하게 증명할 수 있다.) 누가 봐도 공통점이라곤 1도 없어 보이는 직업 둘. 그런데 이상하게도 살면서 자꾸 이 둘의 접점을 발견한다. 어느 순간 나는 두 직업의 공통분모를 수집 중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1. 비위는 훈련으로 길러진다.
간호사 시절. 사람 몸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체액을 본 사람이 나다. 관장하고 대소변 기저귀 정리하고.
"이 정도면 오늘 컨디션 괜찮으시네요?" 라며 진심으로 대화까지 나누던 시절. 그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찜질방 여탕 변기 뚫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고? 여탕 화장실 변기. 정말 강적이거든요. (자세한 묘사는 하지 않겠다. 모두의 정신 건강을 위해.) 대부분의 변기 막힘은 청소이모님이 1차 응대를 하신다. 그리고 2차 응대자가 바로 나다. 그런데 이 순간마다 간호사 시절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이 정도쯤이야...'라며 고무장갑을 낀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이게 바로 경험에서 터득한 비위의 힘. 훈련된 비위. 그건 진짜 자산이다.
2. 교대근무의 고충은 교대근무자가 제일 잘 안다.
간호사 시절. 데이-이브닝-나이트. 정말 시계가 고장 난 듯 돌아가던 근무표 속에서 살았다. 지금은 찜질방 4교대. 누가 갑자기 못 나오면 대신 카운터에 들어간다. (사실 찜질방 카운터는 아는 만큼 보이는 곳이다.) 야간에 카운터를 맡게 되면 사람이 거의 없으니 시간은 오히려 잘 간다. 책도 읽고 유튜브도 보고 커피도 타 마시고. 하지만 리듬은 완전히 깨진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건 '나 예전에 나이트 뛰던 사람이다.' 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 많은 조직에서 생기는 특유의 기류. 그것도 경험치가 있어야 읽힌다. 시기 질투 소외감 수근거림 등등. (대학병원 시절. 이건 거의 커피큘럼이었다.) 지금은 찜질방 수간호사 느낌으로 중재하고 조율하고 기분 풀어주고 있다. N잡 중재자. 인간관계 조율자. '찜질방판 수간호사' 같은 포지션.
3. 불평불만 고객도 결국은 단골이 된다.
병원에서 CS교육을 진짜 많이 받았다.
"불평하는 고객은 떠나지 않는다."
그 말.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그런데 진짜 그렇다. 찜질방에서도 가장 목소리 크고 욕 한번 시원하게 내뱉는 분이 다음 날 또 온다. 처음엔 무서웠다. 나에게 쌍욕을 퍼붓던 분이 다음날 "어제는 미안했어. 자네가 뭘 알겠어." 하며 고구마를 준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정이 들었다고 하기엔 무서웠고 그렇다고 싫지는 않은 이상한 감정. 그분은 불평이라는 방식으로 찜질방에 애정을 표현하고 있었던 거다. 결국 라포가 생기고 나면 욕 대신 불만사항을 "아. 이런 게 조금 불편하네~"라고 말해준다. 이건 진짜 찐 단골의 전환점이다.
4. 개선은 제안하는 자의 몫이다.
간호사 시절. 병동에서는 위원회가 있다. 그중 '창안위원회'라는 것이 있었다. 창안위원회는 기존의 간호시스템에서 개선할 점은 없는지, 아이디어를 내서 일의 효율성을 올리는 거다. 그래서 우리 병동에서는 얼음주머니에 찍찍이를 달아 고정하는 논슬립아이스백을 개발하여 상을 받았다. 찜질방에서도 매일 반복되어 사용해 오던 것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이용할 까 고민하게 된다. 예를 들어 찜지방 좌식샤워기 독점 문제. 목욕 바구니를 거기 올려두고 찜질 가는 바람에 다른 사람은 사용할 수 없는 구조. 그래서 선반 하나를 만들었다. 공용실에 찜질방을 이용할 때에는 목욕바구니를 특정 선반에 올려놓고 이용하는 거다. 아직 이런 문화가 자리 잡지는 않아 활성화는 되어 있지 않지만 배려문화가 자리 잡기를 바라고 있다. 누가 보자마자 "좋은 시스템이네요." 하며 따르는 세상은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기존시스템에서 벗어나 개선하거나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 외 간호사시절 배웠던 소방훈련대피, 소화기사용법, 심폐소생술 교육, 간단한 상처치료 같은 것들이다.
+ 보너스 : 벌레에 물린 손님과의 격투
가장 난감했던 순간은 벌레 물렸다고 물파스 달라는 손님이었다. 긁고 또 긁고 거의 파낼 기세였다. 염증이 올라오고 있었고 나는 간호사적 판단으로 "물파스는 안 됩니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 순간부터 상황은 빠르게 악화.
"내가 이거 달라잖아!!"
"내가 찜질방 많이 다녀봤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당장 책임자 불러."
...그리고 결국. 드렸다. 그놈의 물파스. (의료인의 판단이 서비스인의 현실에 굴복한 순간)
그렇다. 경력이 항상 도움만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모든 경험이 언젠가 한 줄의 에세이로 쓰이리라는 것을.
결국. 간호사였기에 찜질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불평불만 손님, 변기와의 사투, 여직원들 간의 감정 조율, 야간 카운터의 적막, 샤워기 독점 문제 해결, 벌레 물린 곳에 물파스를 바를까 말까의 고민까지. 간호사였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N잡러가 된 것도 계획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인생 같고 더 실감 난다. 앞으로 더 다양한 직업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직업을 하더라도 간호사였던 나는 그 안에서 쓸모 있게 살아남을 것이다. 찜질방 여탕 수리공에서 시작된 N잡이 세계는 생각보다 넓고 그리고 때로는 아주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