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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May 12. 2022

내 고향은 폐항

- 여는 글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영화 「변산」을 떠올릴 때마다 이 시구가 기억난다. 시는 영화 속 주인공인 학수가 썼다. 변산의 어느 어촌에서 태어난 학수는 가난한 고향이 싫고, 속 못 차리는 아버지가 지겨워서 도망치듯 서울로 갔다. 구실은 래퍼가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지만 오디션에서 번번이 미끄러지고 만다. 트라우마 때문이다. 사고를 치고 경찰에 쫓기던 아버지는 어머니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잊어버린 줄 알았던 전라도 사투리가 잔뜩 묻어나는 전화를 받는다. 병원인데, 아버지가 위독하시단다. 가야 할지 말지, 속도 모르는 친구들의 ‘싸가지론’에 떠밀려 내키지 않는 고향 걸음을 한다.


죽도록 싫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국 마주해야 한다. 맞붙어 싸우든 화해하던. 고향이나 핏줄이 그렇다. 질긴 인연은 떠난다고 잊히는 것도 아니고, 자른다고 끊기는 것도 아니다. 달아나기만 하던 학수는 뒤돌아선다. 갯벌 진탕에서 어릴 적 꼬붕 노릇을 했던 친구와 뒤엉키고 동네방네 소문을 들은 동창들이 싸움 구경하러 몰려든다. 친구의 자격지심을 풀어주듯 아버지와 엉켰던 앙금도 풀면서 학수는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떨쳐내려고만 했던 고향을 품어 안으면서 새삼 고향 하늘에 피어나는 노을을 새롭게 본다. 이번에는 자신을 첫사랑으로 좋아했던 선미도 함께.


“장엄하고 이쁘면서, 이쁨서도 슬프고, 슬픈 것이 저리 고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슬픔이 아니겠다.”    

선미는 그렇게 말한다.


선유낙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환상적인 일몰은 선유 8경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어디서든 붉게 물든 저녁노을은 아름답겠지만 굳이 서해의 낙조를 봐야 할 이유는 따로 있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육지의 끝, 지는 해를 쫓아갈 수도 붙잡아둘 수도 없는 시공간에서 마법이 걸린다. 하늘과 바다로 양분된 2차원의 평면에 멀리 또는 가깝게 붙들린 섬들이 빚어내는 긴장이 선유낙조의 큰 매력이다. 여름이 시작되면 고군산의 해는 왼편 대장도와 오른편 멀리 뻗어간 무산십이봉 사이 열린 바다로 떨어진다. 수평선 쪽으로 기울어가며 바다 위로 길게 금빛 수놓은 황천길을 열어간다. 바닷속 용궁까지 이어진 길인지도 모른다. 수면에 가까워질수록 얼마 남지 않은 임종을 지켜보는 하늘은 조바심으로 애를 태운다. 소멸의 순간이 임박하면 태양은 바다 위에 모든 섬을 그러쥔다.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해는 쉽게 놓지 못한다. 저 황홀한 유혹에 멱살 잡혀 먼 수평선 너머로 불려 가지 않으려고 섬들이 저마다 제 그림자를 키워가며 버팀 질 한다. 떠 있는 섬들 사이로 귀항을 서두르는 고깃배는 위험천만하다. 섬의 뿌리가 육지에 닿아 있지 않았던들 그들은 일몰의 순간에 해와 함께 진즉 소멸했을 것이었다. 잦아들던 바람이 거친 숨소리처럼 들리는 짧은 순간이 지나면, 마지막 심지를 태우던 촛불처럼 불이 꺼진다. 풀어진 긴장 틈새로 한기를 품은 어둠이 밀려든다. 길게 내뱉는 숨소리를 듣고 평화로운 안식이 몰려온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영화 때문이 아니었다. 내 고향 심포 때문이다. 비록 다섯 살에 아버지를 따라 전주로 나왔지만, ‘변산 호랑이’라고 불렸던 상 할아버지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신 선산이 있고 가까운 친척이 여전히 살고 있다. 만경강과 동진강 물길이 만나는 거전 반도에서 제일 큰 포구가 심포항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돌머리라고 부르는 선착장에는 물길을 타고 연안 바다로 드나들던 크고 작은 배들이 몰려들었다. 방금 잡아 온 물고기를 경매하던 수협 어판장도 있었고, 포구와 둑을 따라 늘어선 횟집 단지를 찾는 발길로 주말이면 북적댔다. 제법 근사한 모텔도 대여섯 채 성황이었다.

      

집집마다 생합 잡던 그레나 죽합 캐던 써개가 있었다. 노랑 꼬막이 흔해 터져서 동네 아낙들이 겨우내 우물가에 모여 꼬막을 깠다. 껍질을 따로 버릴 데가 없어 안동네에서 돌머리까지 이어진 신작로는 늘 조개껍질 밟히는 소리로 사각거렸다. 노을도 예뻤다. 특히 가까운 망해사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일품이어서 작품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해일처럼 들이닥친 새만금이 모든 걸 바꿔 놓았다. 배를 부리던 어민은 보상을 받고 김제로 익산으로 군산으로 더러는 자식을 따라 도회지로 흩어졌다. 어업을 포기한다는 조건이었다. 농사지어 먹을 땅이 없으면 아무리 고향이어도 더는 붙어 있을 수 없었다. 바닷일이나 농사일이나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부모들의 성화에 자식들은 일찌감치 심포를 떴다. 서울과 인천 그리고 안산과 평택으로 공장일을 찾아 떠났다.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다던 학수의 고향만 어려운 건 아니다. 몇몇 큰 항구도시를 빼고 서해 연안을 끼고 앉은 어촌들의 사정은 엇비슷하다. 섬은 더 하다. 내일도 해는 뜨고 노을이 다시 지겠지만, 어촌의 내일이 밝다고 말하기 어렵다. 고군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나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좇아 섬으로 돌아온 젊은이들이 더러 있다. 낚싯배를 장만하거나 민박을 친다. 풍경 좋은 자리를 골라 카페를 시작한 친구들도 있다.      


‘노을이 밥 맥여 주냐’ 던 여임 씨의 말처럼 선유도 노을이 밥도 먹여주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개장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예감이 좋다. 이른 저녁을 먹고 멍개와 점순이를 앞세우고 노을 구경을 나선다. 굳이 같이 가자는 말도 없었는데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 개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싶다. 몇 발자국 앞서 자주 뒤돌아보며 뒤처진 내 걸음을 재촉한다. 선유도 생활이 아직 낯선 멍개는 노을 지는 해변 산책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렁그렁한 어린 강아지 눈망울에 맺힌 붉은 해가 해당화보다 붉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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