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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Jun 30. 2022

신시도 구불길

바다를 질러 뻗어나간 길은 직선이다.

직선의 의지는 분명하다. 출발점과 종점을 최단 거리로 이으려는 직선은 가장 빠르게 닿으려 한다. 잠시의 해찰이나 잡념도 허락하지 않는다. 단호함은 원근의 소실점을 향해 집중되어 있다. 길 위의 모든 사물이 오직 점 하나로 빨려 든다. 멱살을 잡힌 듯 자동차는 무력하게 끌려간다. 헐거운 공기의 저항은 물살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군산 비응항에서 신시도를 찍고 부안 새만금 홍보관을 잇는 방조제 길, 연장 33.9 킬로미터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축지법 쓰는 손오공의 근두운처럼 내달린다.   

   

‘제한 속도 80’은 최저 속도로 이해된다.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밟아야 한다. 달려야 한다. 경사도 굴곡도 없는 평면에 놓인 이 길에서는 낭만 따위도 없다. 흘깃 뒤를 돌아볼 틈조차 엄두 내지 못한다. 그저 밋밋하다. 방조제 길이로 세계 최장이라는 기네스 기록은 근대 토목 기술이 자랑처럼 내세우던 지표였다.               


장자도까지 들어가는 약 8킬로미터 연결도로는 신시도가 기점이다. 반듯하게 이어가던 길은 여기서 갈린다. 군산시 구불 7길도 이곳에서 출발한다. 구불길은 섬이 품고 있는 봉우리 능선과 해안 길을 돌아 마을까지 이어진다. 월영봉으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고개를 타고 오른다. 해안 자락을 우회하는 연결도로가 나기 전까지 신시도 주민들이 뭍에서 장을 보면 넘어 다녔던 고개다. 방조제 길이 열리고 섬 주민들은 너나없이 차를 갖기 시작했다. 장을 본 물건을 차에 싣고 신시 광장 주차장에 차를 놔둔 채 짐을 지고 월영재를 넘었다. 산 아래 오토바이에 다시 짐을 옮겨 싣고 마을까지 갔다. 험하지는 않아도 짐 진 걸음으로 넘기엔 만만찮은 경사다.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굳이 배를 타지 않고도 뭍을 나다닐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경험이었다.      


정자가 있는 고갯마루에서 길은 네 갈래로 나뉜다. 마을로 향하는 길은 곧장 내리막이고, 199봉으로 가는 왼편 오르막이 있다. 오른편 능선길을 타면 월영봉이다. 어느 봉우리에 서던 고군산 일대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섬의 무리는 모진 풍파에도 흩어지지 않고 잘 견뎌왔다. 봉우리 사이사이 연결도로가 마치 명주실로 꿰어놓은 듯 각각의 섬을 이어가며 수평선까지 멀어진다. 특히 일몰에는 그만한 황홀경이 따로 없다. 늦가을 단풍은 선유팔경 중 하나로도 꼽는다. 월영봉 아래 되내기 뜰에서는 아직 벼농사를 짓는데, 해방 이후에 외국의 원조를 받아 간척했던 논이라고 한다. 짙푸른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황금색 물결과 붉은 단풍이 숨을 가로챈다. ‘바람 열린 너울 길’이란 이름이 새롭다.              


월영봉 정상에서 몽돌해변까지는 내리막이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가는 길에서 시선은 방조제를 오른편에 두고 야미도를 찍고 비응항까지 거침이 없다. 겨우 2백 미터 내외의 봉우리라지만 숫자만으로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은 바다 위에 뜬 섬이 내어줄 수 있는 매력이다.      


대각산 전망대까지는 다시 가파른 오르막인데, 반듯하게 다져놓은 길 대신 삐죽빼죽 솟아난 바위를 타며 올라야 한다. 잠시 전 해변에서 내려놓았던 숨이 다시 벅차오른다. 오르락내리락 가을 하늘까지 이어진 구불길은 드문드문 최치원의 설화가 남겨진 흔적을 더듬어 가는 길이기도 하다. 맑은 날 대각산 정상 전망대에서는 수평선 너머 중국까지 보인다고 한다. 중국 땅에서 우는 닭 울음소리를 들었다거나, 최치원의 글 읽던 소리가 이국까지 닿았다는 말도 전한다. 크게 깨달아 대각산(大覺山), 깊이 은둔했다는 심리(深里), 배움을 통해 새로움을 다졌다는 신치(新峙). 지명 하나하나에 담긴 그의 흔적을 곱씹다 보면 남쪽 능선을 타고 내리는 발길은 어느덧 마을 어귀에 닿는다.      



신시도는 물 위에 뜬 섬처럼 급물살을 타고 있다. 입구부터 버젓한 신축건물이 들어서고, 둥그런 포구를 따라 이어진 선착장 길도 깔끔하다. 골목골목 숨겨진 담장에 벽화들이 새롭다. 고군산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 애환 섞인 주민들의 삶이 포개져 고단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변화의 물살은 마을 정경만이 아니다. 전기와 물을 육지에서 끌어오게 되면서 발전소는 부지만 남겨놓고 흔적도 없다. 옛 마을 터에는 산림청이 운영하는 휴양림이 새로 들어섰고 조만간 13층 높이 호텔로 지어질 전망이다.


마을 입구 갈림길에서 방조제 쪽으로 뻗어나간 길을 따라가면 간척한 논둑을 지나 199봉을 끼고 배수문 전경을 볼 수 있지만, 월영재로 곧장 이어진 지름길을 타면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처음으로 되돌아 나온다.      

멀리 서는 엄두도 안 나던 가파른 오르막도 쉬엄쉬엄 상념과 수다를 섞어 가다 보면 어느덧 정상이고, 힘들게 올랐다고 하염없이 주저앉아 있을 수 없어 터벅터벅 아쉬운 내리막을 타다 보면 종착지다. 땀이 나고 숨이 차오르다가 그럭저럭 바람에 땀을 식히고 숨을 돌리기도 하는 길, 구불길 위에서는 종종 풍경에 넋을 빼앗기기도 하고 방향을 잃기도 한다. 등에 진 짐의 무게를 느끼며 온전히 두 발로 걷는 길, 사람 사는 이치가 또한 그렇지 않던가. 땀에 젖은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구불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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