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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Jan 23. 2021

강 건너 야경 구경

상해 빈강대도(滨江大道)와 상하이 드림


동 매거진의 다른 글에서 나의 상해에서의 최애(最爱)가 예원(豫园)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예원이 현대적인 모습의 상해에 약간의 고풍스러운 색채를 더해준다고 한다면, 상해에 근대적인 모-단함을 선사하는 곳도 존재한다. 바로 와이탄의 건너편, 즉 황푸강 건너에 있는 빈강대도(滨江大道, 빈쟝따따오)가 그것이다. 굳이 순위를 매겨야 한다면 이곳이 나의 차애(次爱) 정도 될 것이다. 지인이 상해에 와서 1박 2일만 묵어야 한다면 아마 나는 낮에는 예원, 밤에는 이곳을 오는 코스를 추천해줄 것 같다. 사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곳이라 추천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데려온 사람들도 백이면 백 다 좋아하기도 했다. 그만큼 분위기도 좋고 예쁜 곳이다.



지도에 녹색 점선으로 그려진 곳이 바로 빈강대도(滨江大道), 그 안에 약간의 공원처럼 조성해둔 곳이 빈강공원(滨江公园)이다. 지난번 세기공원 포스팅에서 소개했던 루쟈주이 공중회랑(陆家嘴 世纪连廊)에서 황푸강 강변을 향해 조금 걸어오면 바로 만날 수 있다. 사실 한자 뜻으로 하면 그 이름이 참 별 게 없다. 물가 빈(滨)에 강 강(江) 자를 써서 그저 강변에 있는 공원, 강변에 있는 큰 길이라는 뜻일 뿐이다. 사람 이름으로 하면 첫째라서 '하나', 뭐 이런 느낌이다. 하지만 상해에서 그 존재감은 더할 나위 없이 크다. 추측컨대 상해를 찾는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보고 상해에 흠뻑 빠졌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고.



3월 중순 상해에 와서 이런저런 초기 정착을 마치고 4월 초 청명절 연휴를 보내고 나면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현업에 있을 때 나와 함께 협업하며 상해에서 거래선 대응을 열심히 해주었던 상해사무소 동료들에게 밥 한 끼 사주는 것. 현업에서 일할 때 상해로 출장을 나오면, 출장이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없어 밥만 적당히 먹고 호텔로 들어오느라 수다를 떤다거나 술 한 잔 기울인다거나 하질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사실 상해에 오자마자 이런 시간을 꼭 갖고 싶었는데 정신이 없기도 없었고, 정신 좀 차렸다 싶으니 청명절이 국가공휴일이라 휴일에 회사 동료를 불러내는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늦어졌다.


청명절 연휴 막바지에 동료들에게 연락을 취해, 19년 4월 9일, 같이 일했던 친구들과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약속 장소는 빈강대도. 당시 회사 상해사무소가 푸동 해항대하(海航大厦)에 있었고, 동료들의 집도 푸동신구(浦东新区) 교외에 있었던지라 셋 중에 가장 한량인 내가 강을 건너가기로 했다. 내가 빈강대도는 처음 가본다고 하니 두 친구는 신이 났다. 상해에서 가장 예쁜 야경을 보여준다며 자기들만 믿으란다. 일단 강을 건너야 하니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루쟈주이(陆家嘴) 역에 내렸다.



루쟈주이 역에 내리니 누가 CBD 아니랄까 봐 루쟈주이 삼 형제가 나를 반긴다. 조금 더 걸으니 동방명주도 내게 인사한다. 아쉬운 건 날이 영 꾸물꾸물하다. 몇 차례 작은 비가 내렸고, 그로 인해 하늘에는 안개와 구름이 동시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런 날은 강변에 가도 보이는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왠지 힘이 빠진다. 그 와중에 위챗으로 이런 사진이 왔다.



몇 분 전 사무소 근처에서 찍은 석양이라며, 좀 이따 보자고 동료들이 보내온 이 사진은 나를 더 맥 빠지게 했다. 안개가 자욱한데 경치가 뭐 제대로 보이겠냐고.... 하지만 경치 보자고 이 친구들을 부른 건 아니니 그 말은 잠시 넣어둔다. 그래도 용하게 건물 사이에 져가는 태양이 찍혔네. 이미 빈강대도의 야경에 대한 기대치는 곤두박질친 상태로 약속 장소에 다 왔을 무렵, 생각지도 못한 야경이 나를 반긴다.



안개로 시야가 조금 흐리긴 하지만, 산란된 빛이 화려한 조명과 만나 야경이 오히려 더 예쁘게 보인다. 그리고 문득, 여기가 바로 와이탄의 맞은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오기 전에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선천적 길치라 약속 장소까지 제시간에 도착하는 목표만 생각했고, 동료들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느라 정작 왜 이 친구들이 내게 '멋진 야경'을 보장한다고 한 것인지는 깊게 생각을 못해본 것이다. 와이탄에서 바라본 푸동은 동방명주와 마천루가 가득한 메트로폴리탄의 모습인데, 이곳에서 바라본 와이탄은 그야말로 20세기 초반의 모던 상하이다.



일전에 상해의 조계지 역사에 대해서는 <머리로 느끼는 상해> 편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바 있다. 개항과 동시에 세워진 각국의 조계지 때문에 황푸강 강변에는 각국의 건축 양식의 특징을 간직한 다양한 건물이 세워졌고, '만국 건축박람회장'이라는 별칭까지 지어졌다고. 그리고 이곳, 빈강대도를 밤에 방문하면, 그 만국 건축박람회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변을 따라 세워진 유럽 어느 도시에 있을 법한 건축물들, 그들을 수놓는 화려한 조명, 잔잔하게 흐르는 황푸강의 강물, 이따금 들리는 뱃고동 소리. 그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이곳에 오면 왠지 감성적으로 변할 것 같은 풍경이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카메라 초점이 하나도 맞질 않는다. 심지어 손떨림까지 발생. 다시 보니 잘 나온 사진이 하나도 없다.



일반 사진으로 촬영을 하기에는 한 폭에 담을 수 있는 너비가 너무 부족하다. 잘 다룰 줄도 모르는 기능이지만 파노라마 기능을 켜본다. 강을 뒤덮은 안개는 짙어졌다 옅어지며 그 모습을 달리 한다. 넋 놓고 사진을 찍고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주위를 보니 만나기로 한 동료들이 뿌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괜찮다며 계속 사진을 찍으란다. 어째 좀 민망하다. 다 찍었다고 하니 슬슬 저녁도 먹을 겸 한 잔 하러 가잔다. 그렇게 간 곳은 파울라너 펍. 열심히 사진을 찍은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따종뎬핑 속 Paulaner 펍의 정보 및 테라스석의 사진


파울라너 맥주와 맥주에 곁들여 먹을 안주들을 파는 곳. 따종뎬핑(大众点评)에서 찾은 이 정보처럼, 이 식당의 아주 우월한 장점은 위치. 빈강대도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야외 테라스석에 앉으면 방금 봤던 그 광경을 그냥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음식값이 싸지 않다. 아무래도 위치상 너무 좋은 곳에 있다 보니 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는 듯. 함께 밥 먹는 두 동료 중 한 명의 필살기란다. 테라스석에 앉으면 멋있는 야경을 볼 수 있고, 실내 좌석에 앉으면 저녁 8시 정도부터 라이브로 재즈를 들을 수 있다. 둘 다 나쁘지 않다.



황푸강으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 상해의 과거로 넘어온 듯한 착각이 드는 낭만적인 야경, 마음 맞는 동료들. 이런 좋은 안주가 있으니 맥주가 달다. 와이탄처럼 사람으로 북적거리지도 않고, 마음 맞는 사람과 만나 시간을 보내기 딱 좋다. 이렇게 모처럼 회사를 벗어나 과거의 전우들과 함께하니 같이 일할 땐 하기 어려웠던 속 얘기까지 할 겨를이 생긴다.


한 친구가 내게 묻는다. 여기서 강 건너를 보니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나는 그 풍경이 참 아름답다고. 와이탄에서 보는 푸동보다 여기서 보는 푸시가 훨씬 마음에 든다고 대답한다. 그 친구는 한참을 뜸 들이다 이런 말을 한다.


"우리 같은 외지인(外地人)은 푸동의 마천루를 보며 상하이 드림을 안고 이곳으로 오지만, 조금 지나면 이곳, 빈강대도에서 맞은편에 보이는 와이탄과 푸시 지역을 보며 침을 삼켜. 언제쯤 강 너머로 갈 수 있을까, 하고."


함께 자리한 두 친구 모두 상해에서 비행기로 4시간이 넘는 외지 출신. 내게는 지금 다니는 직장이 첫 직장이지만 이 친구들은 이미 다른 회사에 재직하다 이직을 한 경험이 있다. 타지에서 일하다 상해에 처음 온 그 날, 편도 2 위안짜리 황푸강 페리에서 푸동의 루쟈주이 모습을 보고 결심했단다. '꼭 저기 있는 건물 중 한 곳에서 일자리를 찾아 성공해야지!'


그들의 꿈은 반은 이뤄지고 반은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 그들은 푸동의 CBD 루쟈주이의 한 건물에서 블루 컬러로 일할 기회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생각했던 성공의 모습과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가진 돈으로는 루쟈주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푸동신구(浦东新区) 교외의 집 밖에는 구할 수 없었다. 그것도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공동임대(合租) 형식으로. 계약기간 만료가 다가올 때마다 조금이라도 시 중심지와 가까운 곳으로 가려고 알아봤지만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빈강대도 건너편으로 보이는 모던 상하이는 그야말로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지만 막상 잡히지 않는.


강 건너 야경이 어떻냐는 물음을 들었을 때 내가 천진난만하게 아름답다고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상해라는 도시가 내게는 1년이 지나면 떠나게 될 임시 거처였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친구들을 데리고 한강의 어느 공원에 앉아있었다면 이 친구들 역시 천진하게 야경이 아름답다 대답했을 것이다. 이 도시와 그 어떤 관계도 없으므로.


나와 달리 이 친구들에게 상해는 꼭 발을 붙이고 살아내야 하는, 더 나아가 꼭 성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하는 곳이다. 언젠가는 시 중심 가까이로 이사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도 꾸리고, 더 이상 강 건너 야경을 보며 침을 삼키지 않아도 되는 것. 이것이 외지에서 상해로 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꾸는 꿈일 테다.


11시가 되고 강 건너 화려했던 조명은 모두 꺼진다. 모던 상하이가 선사해준 두근거림은 어느새 사라진다. 밤이 와야 꿈을 꿀 수 있다. 내 맞은편 두 명의 친구 몫을 포함한 수많은 상하이 드림들을 끌어안고 도시는 잠이 든다. 내일이면 이 도시는 또 다른 이들에게 꿈을 꾸게 하겠지. 상해를 먹여 살리는 건 결국 이 모든 사람들의 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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