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고됐고, 애가 닳았다.

Episode 6.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by Jin

“여보세요?”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지나기도 전에, 너는 전화를 받았다. 햇살이 반짝이는 커다란 벚나무 아래, 다정하게 울리는 너의 목소리를 듣자 힘들었던 내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참아왔던 서글픔, 서러움, 외로움, 불안과 같은 위태로운 감정들이 한꺼번에 나를 집어삼키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너의 다정함이 나를 울게 했다. 끅끅하고, 입술을 아무리 짓이겨도 소리는 새어 나왔다. 서러운 감정들이 입 밖으로 자꾸만 나가고 싶어 했다. 두 눈을 질끈 감아도 눈물이 얼굴을 타고 마구잡이로 흘러내렸다. 신 앞에서 울부짖으며 기도 하는 그들과 내가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신에게서

어떤 다정함을 느꼈던 걸까.


너는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멈추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다그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안도감이 나를 더 울게 했다. 그들은 신에게서 이런 안도감을 느끼는 걸까. 허망하게 가버린 아버지와 달리 너는 내 곁에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위안을 받았다. 너는 나의 이런 마음을 이용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약한 모습을 서슴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꺼내 보일 수 있었다. 내 옆을 지나가던 학생들이 힐끔거리며 날 쳐다봤지만, 나 하나만으로도 벅찼던 나는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 울음이 잦아들자. 괜찮아? 하고 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낮고 담담하지만 다정한 너의 목소리. 내가 우는 동안 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 미안해.”

그냥 다 미안해.


우느라 쉬어버린 내 목소리가 유난히 이질감 있게 느껴졌다.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 내 마음 전부가 드러난 기분이 들었다. 너는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너는 대체 뭐가 그렇게 항상 괜찮은 걸까. 어떤 일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받아준다. 지금 무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전화를 걸어 시간을 빼앗았는데도, 한 치의 짜증도 없이 나를 받아주는 너는 무슨 생각인 걸까. 도대체 뭘까.


나를 마음에 둘 수 없다면서 왜 이렇게 친절한 걸까. 나에게만 이러는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도 이러는 걸까. 갑자기 짜증이 났다. 화가 났다. 너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네 다정함이 나를 가둬버린 것 같아 화가 났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너에게 기대고 싶은 내가 너무 짜증 났다. 그냥 - 네 마음을 말해줘. 너에게로 오라는 거야? 너에게서 멀어지라는 거야? 어쩌란 건데.

… 나쁜 새끼.


나 혼자 자꾸 기대하고

욕심을 키우게 하는

나쁜 새끼.

그런데도, 네가


“보고 싶어”


이 글을 쓰며 떠오른 건, 그때의 내가 정말로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내 감정 너에게 던져버릴 거야.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는 마음으로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나는 어떤 관계든, 어떤 상황이든 쉽게 성립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면,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겨우 붙잡고 있던 너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했던 내가 이 감정을 쉽게 너에게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너에게 ‘보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너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외면하지 않을 거란 걸, 나는 알고 있었던 거다.


“보면, 되지.”


그래도 나는 네가 잠시라도 대답을 머뭇거릴 줄 알았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보고 싶으면, 보면 되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는 너의 말에 아까 울어서 메이는 건지, 어쩐지 목이 메었다. 그래서였을까. 매년 벚꽃이 피는 순간마다 너를 떠올리는 것이 너무 당연해진 게. 연분홍빛으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한순간에 세상을 삼켜버리듯, 속절없이 너에게 나는 집어삼켜졌다.


너는 내 세상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에서 만났다. 눈이 부시도록 맑고 깊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너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냈고, 내 마음을 숨기려 애를 쓰며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골랐다. 있잖아. - 쫑알쫑알. 정말 그랬겠네. 하고 대답해 주던 너. 저 꽃 너무 예쁘지 않아? - 쫑알쫑알. 정말 예쁘네.하고 대답해 주던 너.


이거 사진 찍어야겠다. 하고 멈추면 너도 따라 멈춰줬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너와 나의 사이만큼 떨어져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아서, 나에게 괜찮냐고 하지 않아서 아버지의 부재를 잠시 잊을 만큼 온 신경을 너에게 썼다. 하느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 님을 찾는 이들도 이렇게 마음이 시큰거릴까?


이렇게 신경을 쓰면서 믿고, 의지하는 건가. 너라는 나의 종교 말고, 좀 더 편안한 다른 종교로 개종해야 하나, 어쩌나 혼자 그렇게 생각이 들 때쯤, 그러다 뜻 모르게, 네가 나를 보고 입술에 힘을 주고 일자로 만들어, 눈을 접어 웃을 때면 개종이고 뭐고, 온 세상이 꽃으로 뒤덮이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은 네가 진심을 담아 웃는 표정이라서 과장을 조금 더 보태면, 과 건물 옆 커다란 벚나무를 비추는 일렁이는 햇빛처럼 보였다.




나는 행복해졌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행복했던 건, 나와 대화 중에 네가 그렇게 웃어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너를 미소 짓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란 걸 확인을 받는 것 같아서. 너를 내 안에 담은 깊이만큼,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고됐고, 애가 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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