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5. 그저 그런, 지극히 일상적인 날.
언제나처럼,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단 한 번도 늦은 적 없는 계절.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이라도 한 듯, 잊지 않고, 망설임 없이. 햇살은 조금 더 따뜻해졌고, 바람은 덜 매서워졌다. 얼었던 땅도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봄은 묵묵히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어쩌면 봄은 모든 계절 중 가장 성실한 계절이었다.
봄이 왔다는 건,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두꺼웠던 옷을 벗고, 마치 새 삶을 맞이한 듯 걸음을 가볍게 내디뎠다. 캠퍼스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고, 새로 온 얼굴들 사이로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하지만, 나는 매년 봄이 오면 어김없이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일렁였다. 봄은 새로운 것들이 탄생하는 계절이기도 했지만, 내게는 죽음과 가장 맞닿아 있는 계절이었다.
그래서 봄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슬퍼졌다. 풍경도, 사람도, 시간도 바뀌었지만, 아무리 슬퍼도, 괴로워도, 내 고통에 동조해주지 않는 내 삶과 함께. 나는 이 계절에 고스란히 던져졌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 여기 서 있을까. 교수님은 날 왜 부르셨을까. 내가 궁금해한다고 해서 학생인 내가 뭐 할 수 있는 게 있나?라고 생각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지도교수. 사기근>이라고 적힌 문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똑똑'
“교수님, 저 왔습니다.”
“어, 그래.”
교수님은 천천히 고개를 드셨고, 그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제스처로 교수님은 나에게 테이블 쪽 의자에 앉으라는 뜻을 전했다. 나는 다시 작은 숨을 들이쉬고는 조심스럽게 교수님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불청객이 된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말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의자에 앉았다. 낯섦 속에서 나는 왜 이렇게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지. 등을 완전히 기대지도 못 한채, 쭈뼛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아 기다리니 교수님이 내게 말했다.
“이서 너, 요즘 뭐 하는 거 있니?”
“어… 아르바이트요?”
“그래.”
“카페요.”
잠시 생각을 하시던 교수님이 물으셨다.
“토요일엔 시간 되니?”
“스케줄 조절하면.. 가능은 합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이유로 카페 사장님이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 사장님은 내가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상황을 이해해 주셨고, 덕분에 학기 중에는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시간을 조정해 주시기도 했다. 나는 감사하게도 그 배려 덕에 학교 친구들과의 조별 과제등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으며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내 대답에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기신 교수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토요일에만 일하는 아르바이트 하나 해볼래?”
교수님이 말씀해 주신 아르바이트는 교수님이 아시는 외부 회사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내가 맡게 될 역할은 주로 디자인 관련 업무로 출근은 토요일 하루, 아침 9시에 시작해 저녁 6시에 끝나는 일정. 점심 식사는 회사에서 제공되었고, 하루 일당은 무려 10만 원. 지금 기준으로도 시간당 12,500원에 해당하는 꽤 많은 금액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일주일 중 단 하루만 투자하면 되는 시간, 한 달에 4번. 그리고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경험.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첫 출근 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러 회사로 가야 했다. 학교 수업을 마친 늦은 오후, 나는 앞으로 일할 회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외관은 단정했고, 입구 앞에 섰을 땐 괜히 마음을 한 번 더 가다듬었다. 문을 열고, 나는 밝지만 지나치게 가볍지 않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회사 안의 공기가 잠시 정지한 듯 느껴졌다. 내가 가진 외모나 분위기는 분명 이곳의 평균 연령대나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아직 어려 보이는 학생 하나가 갑자기 등장하자, 안에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누구지?’라는 말이 굳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그들의 눈빛은 솔직했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혹시 교수님이 내가 온다고 미리 말씀을 안 하신 걸까?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오늘 가라고.. 하셨잖아요...' 속으로 중얼이며 당황한 나는,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아. 사기근 교수님 소개로 왔습니다.”
목소리는 분명했지만, 끝에 살짝 올라가는 얇은 긴장이 묻어 있었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누군가가 일어나 다가오기 전까지, 나는 잠시 그곳에 낯선 공기처럼 떠 있었다. 교수님의 이름을 듣자 안쪽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높은 직책에 있는 듯한 인상의 남자였다. 내 쪽으로 성큼 걸어오며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요. 교수님께 연락받았습니다.”
… 악수인 건가? 해야 하나? 잠깐의 망설임 끝에 나도 손을 내밀었다. 높은 직책인 듯한 남자는 악수하며,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나름 친절한 말투였다. 그분은 나를 다른 공간으로 안내했다. 작은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자 파티션으로 얼기설기 나뉜 사무실이 나타났다. 나에게 바로 옆 작은 공간에서 앉아 기다리면 내가 할 관련된 업무를 알려 줄 담당자가 곧 올 거라고 말했다.
작은 공간에 들어서자, 동그란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고, 나는 그 앞에 앉았다. 낯설어 두리번거리는 내 앞에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프로젝트 담당자 이 도윤입니다.'라고 인사한 그에게 나도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 '안녕하세요. 사기근 교수님 소개로 오게 된 강이서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자신을 이 도윤이라 소개한 그는 내게 무심한 말투로 툭 던지듯 말했다. 뭐 마실래요? 나는 별생각 없이, 습관처럼 커피요.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양손에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돌아왔다. 종이컵에 담긴 커피에서는 익숙한 커피믹스 특유의 향이 났고, 그 냄새는 작은 공간 안에 조용히 퍼져 나갔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너를 만났던 그날처럼 강렬하게 각인되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너와 첫 만남은 나에게 모든 게 선명했다. 숨소리 하나, 말끝의 떨림 하나까지도 또렷하게 내게 새겨졌었는데, 그의 첫인상을 기억해 내려니, 마치 오래전 일기장을 펴는 기분이었다. 기억 저편에 있는 한 페이지를 마주한 것처럼. 이상할 만큼,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억양으로 말했는지. 이제 와서 보니 정황상 그랬겠지, 하는 정도의 기억. 어느 정도였냐면. 오히려 커피 믹스 향이 기억이 날 정도. 기억할 만한 사건도, 특별한 대화도, 운명 같은 눈빛 따위는 더더욱 없는. 그저 그런, 지극히 일상적인. 그냥 그런 날. 그렇게,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하지만, 그 기억들 속에 단 하나, 또렷하게 기억나는 게 있다면 나를 처음 만날 때 그가 입고 있던 눈을 찌를 듯 강렬한 비비드 한 색감의 파란 반팔 티셔츠였다. 그 옷은 정말이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안경을 쓰고 입술을 앙 다문듯한 인상의 사람인 그와 나는 시간이 흐른 뒤 어쩌다 연인이 되었다. 연인이 된 후에도 이따금씩 그 파란 반팔 티를 문득문득 떠올리곤 했다. 왜 그 옷은 또렷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을까. 아마도 그 색이, 깊고 조용한 바다를 닮았기 때문일까.
.
.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웃으며 그에게 말하곤 했다.
“생각나? 그 파란 티셔츠!
당신한테 진짜 하나도 안 어울렸어.”
“그래 그거. 사귀자마자 자기가
갖다 버렸잖아. “
아.. 그랬지.
나는 머쓱하게 웃고, 그도 웃었다.
사실, 그날 나는 그를 보며
속으로 조용히 외쳤었다.!!
‘윽… 촌스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