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

Episode 23. 나는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by Jin

슬프게도 나는 찬란한 것이 아니기에. 거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모두 끝을 예상해 두는 편이었다. 여기 정도까지.라는 마지노선이 있었고 이런 내가 그와 연애를 시작하며 Give and Take. 딱 절반씩 나누는 관계. Input이 있으면 Output이 있는 균형 잡힌 관계.라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저울에 올려 무게를 달 듯 정확히 50:50으로 나눈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감정은 수치화되지 않았고,

일정한 양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늘 조금씩 어긋났고

때론 지나치게 기울었다.


나의 가장 초라한 계절의 모습을 본 그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저 내가 숨을 고를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었고, 내가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을 때까지 곁에 있어주었다. 그럼 나와 그는 지금 몇 대 몇 일까. 나는 불확실한 것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이 있었다. 형체도 없이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그 깊이를 사랑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단어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쉽게 뜨거워졌고, 금방 식어버리는 무언가와도 같았다. 처음엔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다가, 시간이 흐르면 같은 눈빛이 어쩐지 불편해지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말도 결국 시간 속에서 퇴색되고,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무뎌질 텐데. 누군가 말했던, '사랑이 밥 먹여주냐'는 말은 내게 현실이었다. 사랑한다는 헛된 말보다 손의 따뜻함이 나에겐 더 큰 위로였다. 달래는 말이나 허공을 맴도는 위로는 필요치 않았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Photo by Jin



나에게. 그가 '사랑해'라고 말하면, 나는 '응'하고 대답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섭섭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나는 아직도 그 단어를 꺼낼 용기가 없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말이 가지는 무게가 두렵기 때문에. 그가 될지 내가 될지 혹은 없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끝나게 될 것을 알고 있기에.


차라리 그런 마음이 들 때면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심장소리를 한번 더 듣는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했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방식이었고, 말보다 행동이 차라리 쉬웠다. 행동 그 자체에는 깊은 의미를 두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의 지갑에서 전 여자친구의 사진이 나온 그날 이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에 자꾸 기대게 될수록, 문득문득 나는 불안해졌다. '사라짐'을 전제하지 않고는 사랑을 말하기 어려운 나여서. 내 마음 한편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어두운 감정의 씨앗이. 발아의 조건이 맞춰지자, 그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조용히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자꾸만 자라났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애써 외면해도 제 멋대로 가지를 뻗고 잎을 키우더니, 어느새 짙은 녹음이 되어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에서 내가 밀려나고 있는 건 아닐까. 다른 누군가에게 내 자리를 내어주게 되는 건 아닐까. 그가 내민 따뜻함이 언젠가는 식어버리지는 않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사람을 믿는다는 것, 기대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그 모든 감정이 내게는 어느새 무서운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잃게 될 것이 두려워, 늘 공격적인 자세로 연애를 했고, 방어했다. 상담사 선생님이 내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서 씨가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이 뭔지 아세요? ‘관계를 끊는다’ 예요."


그 말을 듣고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 나도 모르게 질끈 감은 두 눈에서는 말 끝에 스며 있던 내 마음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눈물로 떨어졌다. '싫어지면 관계를 끝내면 되죠.', '끊어내면 되죠.' 그런 말을 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마치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익숙했고, 낯설지 않았다.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버릇이 이런 것일 줄은. 오른손으로 컵을 쥐고 물을 자연스럽게 마시듯 습관처럼 툭 튀어나온 그 말 안엔,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진심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담실에서 후둑후둑 내 허벅지를 적셨던 눈물은 아마도 더는 외롭고 싶지 않았던 '어린 이서'의 바람은 아니었을까.



Photo by Jin



돌이켜 보면, 버림받을 바에야 내가 먼저 등을 돌리는 쪽을 택했던 건.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오래된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 안의 나를 지키기 위한 나만의 방어기제였다.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마음을 견딜 만큼 충분히 단단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을 마주 할 용기가 없었고, 그 안에 나를 담으면 언젠가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습관처럼 들이닥쳤다.


겉으론 자존감 높은 사람처럼 굴었고, 당당하고 밝은 유쾌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지만, 실은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는 나였다. 누구나 그렇듯 무너진 자신을 다시 일으키는 일은 어려웠기에. 사람을 믿지 않음으로써 내가 덜 다치길 바랐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차라리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편했다. 기대가 커질수록 실망도 커졌고, 그 실망은 곧 내 잘못이 되었기에. 그 모든 불신은 어쩌면 내가 세운 벽이었다.


그래서 어떤 날은, 그의 손을 붙잡으면서도 그가 날 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상상은 점점 자라나 마침내 내가 먼저 헤어짐을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렀다. 상담을 받고, 수없이 마음을 다잡아보아도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는 공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 생각은 안개처럼 자욱이 마음속을 떠돌았다. 물이 들이차듯, 그 두려움은 때로는 말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내 안으로 잔잔한 물결처럼, 때로는 스며드는 어둠처럼, 내 마음 곳곳으로 흘러들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집요했다. 나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꿈에서 깨어나도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처럼. 어쩌면 깨지 못한 꿈을 계속 꾸는 것 같았다. 상처란 건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뻔뻔하고 끈질겼고. 잊고 싶어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더 깊이 파고들었다. 털어내려 애를 쓰면 쓸수록 다시 찾아왔다. 내 마음을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마음 여기저기 곳곳에서 그 마음들이 고여 썩어갔다.



Photo by Jin



나는 그에게 더는 찬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나는 너에게도, 선배에게도 꺼내놓지 못했던 내 본성을 마음껏 드러냈다. 나는 그의 인내심을 끝없이 건드렸다. 때때로 뾰족뾰족, 날이 잔뜩 선 채로 그에게 못되게 굴었다.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해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그러곤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 봤죠? 나 이런 사람이에요. 못 견디겠죠? 그럼 지금 도망 가요.' 그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상처 입은 채로 그 앞에 서고 싶어 했다. 애초에 그는 나를 끝까지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어딘가에선 단정 짓고 있었는지도. 그래서 상처받기 전에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얄팍한 방어.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이 싫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자꾸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는 제멋대로였고, 날이 서 있었으며, 쉽게 길들여지지 않았다. 어른 ‘강이서’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어린 강이서는 나조차 다루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 아이는 그를 자꾸만 시험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이면에는, 빛나는 날만이 아니라 초라한 날도, 무너지는 순간도 그가 껴안아주길 바라는 모순된 바람이 함께 존재했다. 날이 선 말들로 밀어내면서도 속으론 ‘그럼에도 나를 안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 나에게 그는 무엇인가를 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내 옆에 머무르며 계속해서 따뜻한 온기를 내어주었다. 나는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사랑이라는 마음을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Photo by Jin



나는 내 불안을

그에게 돌처럼 던졌고,

나의 초조함에 죄 없는 그를

흔들어대는 나는

그의 고약한 여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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