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는 셈 치고 사랑해 보기

[chapter 4 환자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의료기기를 만들고 싶어요]

by 이진규


사실을 보고, 진실을 말해야 할 때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 때일수록 정답에 가까울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것 너머의 마음을 보는 연습 말이다.


고시원에서의 하루는 움직이는 시곗바늘처럼 오차 없이 흘러갔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근처 교회로 향한다. 새벽예배를 드리고 나면 영어 학원 자습실로 이동해 단어를 외운다. 하나 둘 스터디 팀원들이 도착하면 쪽지시험을 보고 어제 숙제를 해왔는지 서로 확인해 준다.


오후 2시, 학원 수업이 끝나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도망치듯 학원 문을 나선다. 근처 한식뷔페에서 짭조름한 반찬을 잔뜩 퍼담아 밀어 넣고, 다시 자습실로 돌아간다. 제법 넓은 자습실에 책상이 빼곡히 들어찼고, 그 사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빈자리에 앉는다. 복습을 하려고 책을 펼치지만, 이내 졸음이 밀려온다. 공부할 마음은 이렇게 충만한데도 눈이 감기는 걸 보니, 분명 한식뷔페의 과한 조미료 탓이다.


해가 슬며시 얼굴을 감추고 온 세상이 붉게 물드는 저녁, 다시 출출해진 걸 보니 나름 열심히 한 것 같아 뿌듯하다. 단어 앱을 켜고 눈과 입으로 따라 읽으며 고시원으로 걸어간다. 공용 부엌에서 엄마가 보내준 반찬을 꺼내 저녁을 해결한다.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되는 김치볶음밥, 카레 덮밥, 제육덮밥 같은 한 그릇 음식들이다. 부엌 찬장에 놓인 공용 라면엔 손도 대지 않았다. 괜히 엄마가 싸준 음식들이 새삼 더 고맙게 느껴진다.


어느새 어두컴컴해진 거리 위 퇴근길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다시 자습실로 향한다. 영어공부는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에 영어가 장착되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혼잣말로 툴툴거려 본다. ‘이번 시험 점수만 잘 나오면 다시는 영어는 쳐다도 안 보리라’ 다짐도 해본다.


어느덧 짐 싸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더니, 주변 자리가 텅 비었다. 자습실 문 닫을 시간이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나도 짐을 챙겨 나와 자전거에 올랐다. 근처 헬스장에서 땀을 쫙 빼고 뽀송뽀송하게 샤워까지 마친 뒤 고시원으로 돌아간다. 침대에 누워 알람을 맞추고 눈을 감는다. 그렇게 매일같이, 꽉 찬 하루를 심어갔다.


목표는 단 하나였다. 영어 시험 점수를 끌어올리는 것. 영어 공부는 끝없이 이어지는 평지를 걷다가, 문득 돌아보면 간신히 작은 오르막을 지나온 걸 깨닫게 되는 일이다. 매일 걷고 또 걸어도 달라진 게 없는 듯 평평하기만 하다. 그래서 쉽게 지치지만 그래도 계속 걸어야 한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면, 어느새 작은 언덕 하나만큼은 올라와 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은 없다. 그저 걷고 또 걷는 수밖에.


‘어디서 많이 봤던 구문인데... 내일 시험에 나오려나?’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저녁, 한 글자라도 더 읽어본다. 분주한 마음을 달래며 오늘은 일찍 들어가기로 했다. 그동안 갈고닦은 영어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날이 바로 내일 아침이기 때문이다. 운동도 생략하기로 했다. 얼른 가서 자야겠다는 생각에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그때 멈춰 선 버스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뒷문으로 급하게 내리던 사람이 자전거 앞을 막아섰다.


“어어...”

“에이, 씨!”


시커먼 피부에 떡 진 머리를 하고 OO건설이라고 적힌 작업복 조끼를 걸친 아저씨였다. 한쪽 다리에 목발을 짚고, 발에는 새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나는 급히 핸들을 꺾었지만, 가까이서 멈춘 아저씨를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자전거 앞바퀴가 아저씨 신발 끝을 스치고 말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이 참, 앞을 똑바로 보고 다녔어야지. 학생! 전화번호 불러봐”


아저씨는 인도 바닥에 털썩 앉더니, 붕대를 풀어헤치며 다친 곳을 살폈다. 하얀 붕대 속, 까맣게 변한 발이 드러났다. 심한 당뇨로 발이 점점 썩어 들어가는 당뇨족을 앓고 계시던 것이었다.


나는 거듭 사과를 드리고, 상처 부위를 함께 살폈다. 다행히 사고로 더 악화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내일 꼭 병원에 가보세요. 그리고 연락 주세요.”


조심스럽게 전화번호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새벽 1시, 문자가 도착했다.


“이거 아픈 것 같은데 어떡할까?”


검게 변한 발 사진도 함께였다. 잠결에 확인한 문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더구나 몇 시간 후면 중요한 시험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들거리는 마음을 붙잡아보려 안간힘을 썼다. 어차피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얼른 제자리를 찾아야 했다.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아프진 않다”는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일 꼭 병원 다녀오시고 연락 주시라고 다시 한번 당부했다.


그렇게 마음의 비가 그치지 않는 밤이 지났다.


시험은 그럭저럭 끝났다. 쏟아지는 영어 듣기 지문을 들으며 한 번, 종이가 터질 듯 빼곡한 독해 지문을 보며 또 한 번, 어제 그 시꺼먼 발이 자꾸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눈을 질끈 감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험이 끝나고 빵집에 들렀다. 아저씨가 좋아하실 것 같은, 견과류가 듬뿍 들어간 케이크를 골랐다. 지하철에 쭈그리고 앉아 정성을 담아 사과 편지도 꾹꾹 눌러썼다. 그리고 전화드렸다.


“우리 집 근처 주유소 앞으로 와.”


어제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의 아저씨가 주유소 앞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사과를 전하고, 편지와 빵을 건넸다.


“나, 당뇨 때문에 빵 못 먹어. 돈 있으면 저기 가서 담배나 좀 사주지.”


오답이었다. 아저씨가 원한 건 빵과 편지가 아니었다. 나는 아저씨와 편의점까지 함께 걸었다. 지갑에 있던 현금을 전부 꺼내 담배를 사드렸다. 태어나 처음 사본 담배였다.


아저씨는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이야기부터 고향 대구 이야기, 동생과 싸운 이야기, 공사장에서 있었던 일들까지.


담배 연기는 점점 짙어졌고, 연기 너머로 아저씨 얼굴이 흐릿해졌다.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고 내 마음은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담배를 다 피워갈 무렵,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즐거웠어. 다음 주에 병원 다녀와서 또 연락할게.


또 오답이었다. 이번에도 아니었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걸까, 세상을 몰랐던 걸까. 전전긍긍하던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문자가 왔다.


“나 병원 다녀왔어. 그때 편의점 앞에서 봐.”


그제야 알겠다 싶었다. ATM에서 현금을 준비해 봉투에 담았다. 그날, 아저씨는 봉투 안을 힐끔 보고는 별 말없이 유유히 사라지셨다.


고민하던 문제가 드디어 풀렸다. 정답은 돈이었다. 처음부터 현금을 드렸어야 했나 싶었다. 두 번은 오답이었지만, 결국 정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떠나는 아저씨의 쓸쓸한 뒷모습이 한동안 눈앞에 아른거렸다. 봉투를 든 손, 그리고 이유 모를 아쉬운 표정. 생각해 보면, 아저씨는 나와의 시간을 조금 즐기셨던 것 같다. 편의점 벤치에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 동네 친구 같은 존재가 필요하셨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건넨 돈은 정답이 아니라 우리 관계의 마침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답과 오답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대신, 오답 같아 보이는 진심을 품고, 정답 같아 보이는 이해를 주고받으며 그 사이를 오간다. 나는 시험 준비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아저씨는 고단한 삶에 지쳐 있었다. 그렇게 상처 많은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나는 이성의 칼을 내려놓고 의심의 갑옷을 벗어던졌다. 조심스럽게 꺼낸 진심은 두 번이나 오답처럼 돌아왔지만, 결국 쌓였다. 천진난만한 줄 알았던 마음도, 오답 같던 순간들도 어쩌면 모두 정답이었다.


속는 셈 치고 사랑하기로 한 순간, 나는 나를 멈춰 세운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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