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을 통해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다
<6일 차>
원장님의 빈야사 요가 시간이다. 지난번의 아찔했던 첫 수업이 문득 생각나 겁이 났지만 마치 오늘이 처음인 사람 마냥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여 요가원으로 향했다.
‘그냥 끝까지 따라나 해보자. 설마 죽기야 하겠어? ^^’
몇 번의 동작을 반복하고, 버티고 또 버텼다. 어떤 동작에서는 버티는 걸 계속하다 보면 특정 부위에 무리가 가는 자세들이 생기는데 오늘은 오른쪽 허벅지가 그러했다. 오른쪽 허벅지를 구부리고 왼쪽 다리를 쫙 편 상태에서 이 동작 저 동작하는 포즈-요가 용어를 기억하여 쓰면 좋겠지만 아직은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벅차서 용어까지 기억하는 건 무리다.- 였는데 와. 죽겠는 거다. 허벅지가 너무 아파왔다.
이때 때마침 들려오는 원장님의 우렁찬 목소리.
“허벅지 불타요!”
‘네네. 제 허벅지 불타요. 살려주세요.’
아마 집에서 혼자 유튜브를 보고 따라 했다면 이내 으아아 못하겠다! 따위의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 관둬 버렸을 동작들인데, 이곳 요가원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이것이 요가원의 장점인가.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덩달아하게 되는 것. 내가 으아아 소리를 내면 분위기가 깨지고 수련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참고 또 참아보는 것. 뭔가 이 플로우에 나도 덩달아 물 흐르듯 방해 없이 가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집에서 하는 것과 달리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되고 나도 모르게 좀 더 버티게 된다. 한계라 쉽게 단정 짓던 것도 어느새 다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회원분들 중에는 분명 나 말고도 근력이나 체력이 부족해 죽기 살기로 덜덜 떨며 하는 분들이 계실 거다. 운동을 하다 비슷한 처지의 초보분들을 발견하면 동지애 같은 걸 남몰래 마음에 피우곤 하는데, 그런 동지들이 덜덜 떨어가며 버티는 걸 보면 나도 뭔가 더 할 용기 같은 게 또 생긴다.
그리고 원장님의 노련한 조련술은 고통도 기쁨으로 승화시켜 버리는 묘한 주술이 걸려있는 듯하다. 허벅지가 불타는 듯 아파와 관두고 싶은데 불타는 게 맞는 거라고 하신다. 그럼 나는 맞게 하고 있는 거니까 그냥 버텨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원장님께서 “허벅지에 불타는 느낌 나도 참으세요!”라고 했으면 참는 것에만 포인트가 되어 버티더라도 좀 괴로운 느낌인데 “허벅지 불타요!!!”라고 하면, ‘너의 허벅지. 불타는 게 맞으니까 계속하면 된단다.’의 느낌이라 약간 덜 괴로운 버팀이 된달까. 역시 요가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불타는 허벅지의 단계를 지나 빈야사 수업의 한가운데에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배가 막 고파 오는 거다. ‘이따 뭐 먹지?’라는 질문을 자신도 모르게 해 버리곤 화들짝 놀랐다. 한동안 배가 고파져서 밥을 먹은 기억이 잘 없었기 때문이다. 배고프단 생각이 오랜만이라 낯설기도 하고 이런 빡센 수업 중에 이런 생각이 난다는 게 스스로 어이없기도 했다. 요가가 진짜 많이 운동이 되는가 보다.
‘아. 집중하자. 집중.’
속으로 온갖 난리 부르스를 떨며 버티는데, 수업 4분의 3 지점 즈음부터는 거의 정신력으로만 버티고 있었고 어느 순간 살짝씩 동공이 풀리려 했다. '아아 앞이 안 보인다. 아아 눕고 싶다.' 하는 순간,
“버텨요! 강해집니다!”
주옥같은 타이밍의 원장님 구령에 내심 절로 박수가 나왔다.
오늘도 이렇게 또 하나 더 버텼다. 빈야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 비록 다리는 달달 떨렸지만 고된 훈련을 하나 단단히 끝낸 전사의 모습 같아 뿌듯했다. 버티고 버티면 나는 더 강해져 있겠지! 속는 셈 치고 원장님 말을 믿어본다.
<7일 차>
내가 다니는 요가원은 월마다 스케줄이 조금씩 변동이 있나 보다. 항상 가는 시간대에 비트요가라는 게 생겼다. 처음 접하는 단어라 궁금하기도 하고 무엇인지 모를 정체에 걱정도 되었다.
‘비트 요가? 비트에 격한 댄스를 접목한 요가인가?’
궁금증에 주말 동안 유튜브로 비트요가에 대해 검색을 했다. 이미 많은 영상들이 올라와 있었고 그중 조회수가 가장 많은 영상을 클릭했다. 영상 속 사람들은 인도 풍 음악에 맞춰 리드미컬하고 우아하게 요가를 하고 있었고 조금은 낯선 포즈들도 있었지만 꽤나 흥미로워 보였다. 많이 어려울 것 같진 않으니 이것도 한 번 해봐야겠다고 다짐하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요가원에 들어섰고 나는 나올 때 네 발로 기어 나왔다. 유튜브 영상을 앞부분만 본 탓이다. 끝까지 다 봤다면 아마 난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영상으로 본 것처럼 가볍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음악도 신비롭고 새로운 경험에 기분이 살짝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중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버티는 동작이 생기더니 나는 점점 리듬을 놓치기 시작했다. 아. 힘든데. 싶을 무렵, 진짜가 나타났다. 막바지에 들어서는 미친 듯이 복부 운동만 하는 거다. 정말 미친 듯이. 누워서 고개만 들어 올린 채 다리를 배 쪽으로 하나씩 끌었다가 폈다가 하는 동작을 하염없이 반복했다. 겉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와 죽겠다.'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상복부가 너무 아팠다. 불타오르다 못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이 맞겠지. 그래. 맞으니까 버텨보자… 아아. 아니야. 더는 안 되겠어.’
철푸덕. 결국 나는 팔다리를 내려놓고 입을 벌린 채 천장을 보고 누워 버렸다.
‘조… 조금만 쉬자. 헉. 헉.’
몇 번의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상체를 일으키고 하체를 들어 올려 복부 운동을 계속했다. 다른 회원님들은 내가 쉬는 동안에도 멈춤이 없으셨다. 정말 존경스러웠다. 입에 거품을 물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때에 드디어 비트 요가가 끝이 났다. 모든 정신과 체력을 비트에 탈탈 털어내고 온 기분이다. 이렇게 해야 운동이 되는 거겠지.
햇병아리인 내 기준에는 다른 일반 요가보다 더 힘들었지만 음악과 함께 즐거운 기분으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보통의 요가가 지겹고 지루하게만 느껴진다면 비트 요가를 추천한다.
<8일 차>
월요일. 아쉬탕가 초급 시간이다! 주말에 배구 애니메이션인 ‘하이큐’를 보고 삘 받아 배구공을 치며 놀았더니 어깨 뒤가 뻐근하다.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렇다던데 요가할 때 더 아프면 어쩌나 살짝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웬 걸, 집에 있었다면 파스를 붙여도 오래갔을 통증일 텐데 요가를 하니 오히려 더 쉽게 풀리는 느낌이다. 그리고 확실히 3주 전 처음 시작하던 때 보다 몸이 많이 풀린 게 느껴진다. 그땐 아무리 노력해도 뻣뻣한 느낌이 났는데 오늘은 조금 덜 애써도 몸이 그때에 비해서 쉽게 늘어나는 기분이 든다. 물론, 아직 전굴 자세도 다리를 구부리지 않으면 힘이 들고, 앉아서 두 다릴 들어 올릴 때도 무릎이 잘 펴지진 않지만 조금씩 나아짐이 느껴졌다.
‘재밌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아는 언니라고 앞서 소개했던 초급 반 선생님께서 세세히 잘 알려주시고 차분하게 수업을 진행해 주어서 천천히 동작을 수정해 가며 따라 할 수 있었다. 힘을 주는 위치나 팔다리의 각도 등을 세심하게 교정받으니 훨씬 더 운동이 되는 것 같았다. 이래서 제대로 된 자세를 지도받는 게 중요한가 보다. 올바르게 힘을 못쓰고 잘못된 곳을 자극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새삼 뭐든 그런 것 같다. 혼자 할 땐 이게 맞는 줄로만 알고 몸에 익어버려 잘한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넓은 곳에 나아가서는 그제야 자신이 잘못된 부분이 많았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또 시야가 넓어지고 성장하는 거겠지.
나도 요가원이라는 세계에 왔으니 좀 더 성장하고 있는 거라 믿고 싶다! 아니 이미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성장했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혼자 유튜브를 보고 운동을 따라 할 때는 조금이라도 어려운 동작이 나오면 하다가 중간에 꺼버리고 오늘 운동 다 했다며 샤워를 해버린다든가, 혹은 쉬운 동작만 골라서 반복한다든가 했는데 요가원에 와서는 중단 따윈 없다. 그냥 다 해버려야 하는 거다.
타의에 의하든 자의에 의하든, 끝까지 무언가를 포기 않고 마지막 쉼까지 편안히 점찍는 단 건 꽤나 좋은 성취감을 주는 행위 같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과정에서의 성장이란 건 무시할 수 없으니까!
견디자. 요가를 하며 견디듯 삶에서도, 글쓰기에서도, 나를 위한 선택에서도 잘 견뎌 보자.
<9일 차>
제길. 며칠째 악몽인지 모르겠다. 요즘 자꾸 싫은 꿈을 꾼다. 불안, 두려움, 조바심이 범벅된 나의 심리 상태가 반영이 된 건지. 이놈의 꿈은 애써 눌러 놓은 무의식의 감정들을 굳이 장면으로 만들어 보여준다. 정말이지 고약하다. 아니 어쩌면 나는 잠들기 전에 ‘아. 꿈엔 낮 동안 감춰둔 불안이, 혹은 방황이 갖가지 장치들로 표현이 되겠지.’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같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생각나듯이 결국 꿈에서까지 그런 것들이 표현되는 거겠지. 내가 영화감독이나 드라마 작가라도 된다면 이것 또한 영감이 될 수 있겠지만 보통의 사람인 나는 그럴 리 만무하니 별 수 없이 더러운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요즘 그 횟수가 잦아졌단 것이다.
아침마다 기분이 너무 안 좋다. 이런 날은 애써 기분을 밝게 전환하려고 일어나기 전에 밝은 곡을 하나 선정하여 무한 반복 듣기를 하는데, 나는 주로 ‘cheese’의 ‘madeleine love’를 듣는다. 경쾌한 리듬에 밝은 분위기의 곡이라 기분 전환에 도움을 주어 몇 년째 나쁜 꿈을 꾼 날의 아침 루틴이 되어있다. 일부러 더 빵댕이를 흔들며 아침 준비를 하러 요란스레 나가 보기도 하는데, 요즘은 이상하게도 도통 이 곡 만으로는 기분 전환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게 이젠 요가가 있으니까! 요가를 가면 좋지 않은 기분의 흐름을 좋은 기분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고생하러 가자!’
말이 좀 웃기지만 난 아직 요가가 어렵고 힘드니까 나름 몸의 고생도 고생인 거다. 불안과 두려움은 몸을 움직이면 좀 나아진다고 하니 분명 요가도 내게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꽤나 애써야 하는 원장님의 빈야사 수업이다. 필히 나를 아찔한 곳으로 안내할 것이란 기대가 있다. 오늘처럼 아침 기분이 좋지 않은 날 이보다 더 좋은 운동이 있으랴.
평소처럼 매트를 깔고 앉았다. 스트레칭 같은 기본 동작부터 시작하는데 어라. 오늘 컨디션이 영 아니다. 늘 해오던 같은 동작인데 오늘따라 힘이 자꾸 빠지고 더 많은 집중을 요구한다. ‘아 오늘 애먹겠는데… 이런 시작으로 끝까지 잘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약한 생각은 할 수 있는 동작도 일찍 포기하게 만든다는 걸 이젠 좀 알기에 ‘아냐. 해보지 뭐. 하다 쓰러지면 이 많은 사람 중 한 명 정도는 날 구해주지 않겠어?^^’ 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빈야사를 계속 이어가니 몸에 열기가 금세 후끈 올라왔고 축축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4분의 3 지점 정도 되었을까. 깔딱깔딱 호흡이 가파르게 올라왔다. 게다가 오른쪽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 저번엔 쉽게만 되던 동작이었는데 자꾸만 힘이 풀린다.
‘그래도 버텨보자. 어떻게 되나 해보자.’
다시 집중. 아파도 힘들어도 눈에 힘주고 버티고 불태워 잡념 따윈 다 날려버리는 마음으로, 몸의 움직임과 호흡으로 나쁜 꿈의 장면들을 조각조각 찢어 태워 없애는 마음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했다. 후들거리면서도 버티고 버텼다. 그런데 이게 좀 도움이 되었는지 힘이 없던 오른쪽 다리에 다시 가볍게 힘이 붙기 시작했다.
‘신기하다. 그거 하나 넘겼다고 또 이게 되네?’
내심 반응하는 내 몸에 감탄하며 포기하는 동작 없이 끝까지 해냈다.
마지막 사바아사나를 하며 눈을 감는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 보다 기분이 한 결 나아짐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오길 잘했어.’
<10일 차>
아쉬탕가 수업이다. 그간 아쉬탕가 기초 수업만으로도 벅차하던 나였는데 얼마 전부터 내 몸이 첫 수업보단 훨씬 수월히 따라가기에, 뭣보다도 원장님께서 일반 아쉬탕가 수업도 초보들이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라 하셨기에 오늘은 용기 내어 ‘그렇다면 도전?!’이라 외치고 씩씩하게 요가원으로 갔다. 아! 그전에 감사히도!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매우 딥슬립을 했던 몇 안 되는 감사한 날이다. 하지만 컨디션이 최상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오늘따라 무지하게 집중이 안된다.
나는 새로운 것, 새로운 사람에 대한 긴장이 꽤 있는 편이라 '아쉬탕가 강사님은 어떤 분이실까?, 수업 레벨은 어떨까?' 하며 궁금하지만 조금은 긴장한 마음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다행히 아쉬탕가 선생님은 편안하고 안정된 음성으로 물 흐르듯 잔잔히, 하지만 세세하게 수업을 진행해 주시는 분이라 마음의 긴장 따위는 금세 잊을 수 있었다. 적절한 비유도 써주며 수업을 이해하기 편하게 이끌어 주셔서 또 좋았다. 문제는 집중을 못하는 나 자신이다. 집중이 안되니 어제보다 몸이 더 흔들리고 쉽게 힘이 빠지려 한다. ‘에잇, 그냥 해. 그냥.’ 하며 평소처럼 마음을 가다듬지만 잠시도 못 가 또 흔들흔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음 주부터 생리 시작이다.
‘하…… 어김없네.’
어김이 없다. 나는 생리 전 증후군이 심하게 오는 편이다. 이번엔 속이 좀 거북하고 살짝 탈 난 정도로만 지날 줄 알았는데 몸에 힘이 없다니. 뭔가 요가 수업을 받기도 전에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고 온 사람 마냥 몸이 늘어지고 쉬고만 싶다. 하지만 이렇게 쉬면 정작 생리기간에 또 며칠을 쉬어야 하므로 이런 걸로 빠져선 안 되는 거다. 힘들고 늘어지고 중간에 멈춰 쉬더라도 나와서 움직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빠지면 다닐 수 있는 횟수가 며칠 안되어 버리니까. 돈도 돈이지만 이제 좀 익숙해지고 탄력 붙었는가 싶은 때에 쉬어 버리면 진짜 영영 쉴 것 같다. 물론 나는 100일 요가라는 목표를 가지고 글을 쓰기에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지만 만약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늘어져서 흐지부지하다 관둬버렸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나는 그랬으니까. 조금 맛보고 ‘아. 하나 했다.’하며 쉽게 만족하고 다른 걸 찾는다.
늘 그런 식이었다. 무엇을 오래 이끌어 가는 법이 없다. 가령 좋아하는 A, B, C의 세 가지 활동이 있다면, A활동을 먼저 한 분기 정도 하고 관둔다. 그러고는 ‘아. 했다.’ 이러고 B를 시작한다. 그러더니 별안간 B도 비슷하게 하다 관두고 C를 한다. 그리고 고민하다 다시 A로 돌아간다. 하나를 끝내는 법이 없고 이렇게 조금씩 하다가 바꾸고를 반복하는데 웃긴 건 다 거기서 거기인 활동들이란 거다. 뭔가 임계점을 하나씩은 더 넘겼으면 좋겠는데 변덕이 좀 있는 성격이라 그런가 패턴 바꾸는 게 영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매일같이 하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건 바로 ‘글쓰기’이다. 일기이든 간단한 메모이든 간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는 유일한 한 가지가 내게는 글쓰기인데, 그렇다면 이 글쓰기에 저 활동들을 접목하는 건 어떨까 싶어 시작한 게 바로 이 100일의 요가 일기이다. 프로젝트라도 되는 마냥 100일을 채워보는 거다. 100일인 이유는 딱히 없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숫자 100은 무언가의 완성 혹은 완전한 느낌이니까. 무언가 이룬듯한 느낌도 들고 꽉 찬 뿌듯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름의 상징성을 띄는 가장 단순한 숫자가 내게는 100인가 보다. (단군신화에서도 100일간 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버틴 곰이 사람이 되었다지 않나. 그러니 이 100이란 숫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꽤나 상징적인 숫자였을 거다. 아마도. 그럴 거다. 아님, 말구요...)
피아노를 취미로 할 때에도 한 곡을 100번 치기를 목표로 한 적이 있다. 애석하게도 한 번에 100번은 못 쳤지만 50번 치고 쉬다를 서너 번 반복하니 지금까지 3년 동안 그 한 곡을 200번은 넘게 쳐봤을 거다. 이 정도 해보니 이젠 눈 감고도 칠 수 있다(면 좋겠다). 손에 익어 어렵지 않게 치는 수준은 늘 유지하는 것 같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그림도 마찬가지다. 2019년 봄에 산 비틀즈 유화 그리기를 2021년에야 완성했다. 몇몇 물감들이 굳어 뒤늦게 완성하느라 애먹었지만 결국엔 낑낑대며 완성했다. 끝내기는 끝내고야 마는 성격인 건가.
변덕이 있는 꾸준함. 변덕과 꾸준함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은데 저렇게 내 패턴을 쓰고 나니 꽤나 꾸준하다. 이런저런 취미라도 해보니 나를 좀 아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그것 참 괜찮은 행위로구먼. 하지만 이젠 목표를 가지고 끊김이 없이 무언가를 달성했을 때의 기분이 궁금해졌다. 중요한 건 ‘끊김이 없다’는 거다. 변덕을 이겨내 보고 마침표를 찍는 그 기분이 궁금하다. 무엇보다도 저물어가는 30대를 이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내 손에 잡히고 가장 잘 보이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내 손에 잡히는 것.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그건 바로 내 몸이었다. 나는 정돈이 필요했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어지럽혀진 이곳에서 나는 나를 꼭 붙잡고 타이르고 살펴 봐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뒤틀린 것, 엎어진 것, 외면한 것 등을 남의 힘이 아닌 온전한 나의 것들로 들여다보고 정돈해야만 했다.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았다. 생각과 갖가지의 사유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내 몸을 적극적으로 쓰고 싶었다. 잘 들여다보며 나를 더 알아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런 나를 토대로, 조금은 새로워진 각도를 가진 채 주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눈을 맞추며 잠시 멈춘 내 인생의 항해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물 흐르듯 편안하게.
나의 몸을 온전히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것. 어떤 도구에의 도움 없이, 공간의 제약 없이 내 몸뚱이 하나를 내 정신으로 오롯이 이끌고 견디며 스스로를 바라보고 정돈할 수 있는 운동으로는 요가가 제격이라 생각이 되었다.
몸에 자꾸 힘이 풀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했다. 마치 방금 막 건진 오징어처럼 축 늘어져 보이는 몸짓이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따라 하려 노력했다. 그래. 오늘도 하나 했고 조금씩 채워나가면 된다.
힘들지만 하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