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박물관(2)
안용복 일행과 관련하여 숙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1693년:숙종19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사이 외교 분쟁이 발생. 울릉도에 많은 까마귀, 소리개, 고양이, 너구리, 살괭이를 왜인들이 마구잡이로 포획해 갔다.
1787년:정조11년. 울산에 사는 주민 11명이 몰래 울릉도로 잠입해서 고기와 향죽을 채취하다 삼척에서 붙잡혔다.
1794년:정조18년. 독도를 가지도라고 불렀다.
1870년:고종7년. 일본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에 울릉도, 독도를 조선령으로 보도
1883년:고종20년. 울릉도 첫 이주민 16가구 54명이 이주하였다.
1900년:광무4년. 칙령 41호를 반포하여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군수를 둠. 울도군수의 관할구역을 울릉도와 죽도, 석도 (독도) 로 함.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전에 고종이 발표한 칙령 제41조가 조선으로서는 마지막 공문서라고 볼 수 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체결 이전인 1905년 2월에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한다는 시마네현 지사 명의의 고시문이 있어 일본은 이를 을사조약 이전의 정부 문서로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한 대한제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사이에 국교회복을 위해 상호우호조약을 체결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을사조약으로 독도가 다께시마라고 주장할 수 없어 그 이전에 고시된 시마네현고시 제40호로 계속 우기고 있다.
계속해서 주요 사건을 정리해 보면,
1905년:광무9년. 일본 각의가 독도를 일본령에 편입하기로 결정하고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 편입을 발표하였다.
1915년:총독부령 제44호로 군제를 페지하고 제주도와 울릉도를 도 (섬)제로 변경하여 울도군청을 울릉도청으로 군수를 도 (섬) 사로 개편.
1946년:연합국사령부 지령 677 공표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한국령으로 함.
1948년:독도 부근에서 미군폭격연습으로 어민 사망.
1949년:강원도에서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환원.
1951년:일본 법령집에 '일본의 부속도서에서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를 제외한다'고 명시됨. 대장성령 제4호와 총리부령 제24호에 명기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끝난 게임같은데 왜 노란 다깡들이 우기는지 김치남과 된장녀들이 잘 모르고 있슴.
1952년:한국 정부가 인접 해양주권 (평화선) 을 선포하자 일본 항의로 본격적인 독도 영유권 분쟁 발생.
1953년:일본인이 독도에 상륙하여 조난어민 위령비를 파괴한 사건이 있은 후 국회에서 경비대 상주를 결의하고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되어 활동 시작함.
1955년:독도에 신등대 설치.
1965년:울릉군 주민 최종덕씨가 독도에 거주하며 어로 활동시작함.
1979년: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
1981년:최종덕씨 독도 주민 1호로 등록.
1996년:독도에 접안시설 공사 시작.
1998년:신한일어업협정체결
2000년:독도리 신설
2005년:독도 동도 개방
2007년:김성도씨가 독도리 이장으로 임명.
2015년:재미교포 지노킴이 3박4일 일정으로 울릉도, 독도를 다녀간 후 지리멸렬한 울릉도 독도 여행기를 브런치에 올림.
강치 이야기는 훨신 앞전에 "뒷북치는 한국정부의 독도 홍보전략"에서 언급한대로 일제 강점기 전에는 울릉도, 독도를 비롯한 동해안에 약 3-5만마리가 서식했었는데 단무지 애들이 남획하여 회를 쳐 먹었는지 수시싸서 말아 먹었는지 멸종되어서 슬픈 이바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짜로 슬픈 것은 강치가 동해에서 사라진 것보다 일본 정부가 강치를 내세워 독도 홍보 전략을 내세우니까 그제서야 대응책을 마련하여 뒷북치는 한국 정부의 대응 태도가 한심해서 슬프다는 것이다.
1952년 일본인의 독도 조난어민위령비 파괴사건으로 독도의용수비대가 1953년 조직되었다고 앞에서 언급했었다. 그들은 1956년 12월 독도 경비 임무를 국립경찰에게 이양할 때까지 3년 8개월동안 힘든 여건 속에서도 맡은 바 직무를 국가에 충성하는 애국심으로 기꺼이 수행하였다. 두서너 차례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과 총격전으로 퇴함시키기도 하였고 1955년에는 일본 순시선과 3대의 비행기 공격을 받았지만 총격전으로 비행기 1대를 격퇴시킨 무용담도 살아있다. 그 공로를 치하하여 1996년 독도 의용수비대 전원에게 대한민국 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박물관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기록물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독도에 관한 서양 최초의 기록들로 미국 선적의 포경선들이 고래잡이하러 동해안으로 들어왔다가 독도를 발견한 기록들이다. 당연히 그 당시 해도에는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아 보는 이 마음대로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 미국 포경선 체러키호 기술:
1848년 4월 16일. 일요일. 약간 흐린 날씨에 남남동 실바람이 분다. 고래기름 짜려고 기름덩어리를 삶으면서 동쪽으로 항해했다. 해질녁에 북북동쪽 15내지 20마일에 위치한 울릉도 (dagelet island)를 보았다. 오후에도 고래 기름덩어리 삶으면서 남동쪽으로 나아갔다. 돌고래를 보았다. 우리 해도에 있지 않은 두 개의 작은 섬이 남동쪽 20내지 25마일에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보듯이 울릉도는 dagelet island로 해도에 표기 되어 있었지만 독도는 해도에 없어 그냥 '두 개의 작은 섬'으로 기록하였다. 독도의 동도와 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인이 발견한 독도의 최초의 기록이다.
(2) 미국 포경선 목티주마호 기술:
1849년 3월 2일. 금요일. 오늘 아침 배 위치는 동경 131도 15분. 동남풍이 불어 날씨가 흐리다. 배가 북쪽으로 항해하니 울릉도가 보였다. 그리고 뾰쪽한 바위가 보였는데 해도에 나와 있지않다. 위도는 북위 31도 10분이다. 오후도 오전과 비슷하였다. 경도는 132도. 강풍이 불지만 맑은 날씨였다. 멀리서 육지가 보인다. 오늘은 이렇게 끝난다.
3월 3일. 토요일. 오후 2시에 두 마리의 긴수염고래를 발견하였다. 보트를 내렸다가 허탕치고 배로 돌아왔다. 뾰쪽한 바위가 보였다.
3월 9일. 금요일. 오전 7시에 고래를 발견하여 보트를 내렸다. 중간과 우현 보트가 맞혀 죽였다. 잡은 고래를 뱃전 옆으로 끌고왔다. 그리고 두 척의 포경선이 보였으며 뾰쪽바위가 보였다.
여기서 말하는 뾰쪽바위를 pinnacle rock으로 기술하였는데 독도의 동도와 서도를 말하는 것이다.
(3) 미국 포경선 윌리엄 톰슨호의 기술:
1849년 3월 18일. 일요일. 좋은 날씨이다. 오후 1시경 어느 해도에도 실려있지 않은 3개의 바위가 바람이 불어 오는 쪽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울릉도의 동남동쪽 40마일 거리에 있었다. 고래를 잡으려고 보트를 내렸으나 맞히지 못하였다. 포경선 이어리호가 고래잡는 것을 보았다. 그 배에 가서 약간의 신문을 얻었다.
여기서 기술한 세 개의 바위는 독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성종실록에서 독도를 삼봉도로 불렀던 우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독도는 실제는 동도와 서도 두개로 이루어진 섬인데 보는 각도에 따라 세 개의 봉우리로 보이기도 한다.
(4) 미국 포경선 캠브리아호의 기술:
1849년 4월 28일. 토요일. 남남서에 위치한 울릉도를 보았다.
1849년 4월 29일. 일요일. 맑은 날씨에 북동쪽으로 부터 세찬 바람이 불었다.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해질녘에 돛을 줄였다. 새벽에 모든 돛을 폈다. 해도에 있지 않은 작은 섬을 보았다. 나는 그 섬을 북위 37도 10분, 동경132도로 측정한다.
이 일기에는 울릉도와 독도의 그림까지 스켓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1855년 프랑스 해군함정 꽁스딴틴호가 사상 최초로 그렸던 것으로 알려진 독도 그림보다 6년 앞서는 최초의 독도 그림이라고 한다.
(5) 미국 포경선 헨리 닐랜드호의 기술:
1853년 4월 18일. 월요일. 쾌청한 날씨였다. 울릉도와 물개바위를 보았다. 물개바위에 상륙하여 물개 7마리를 잡았다. 그 물개바위 위치를 위도 37도 10분, 경도 131도 40분으로 측정한다.
여기서 물개바위는 독도를 의미하는데 강치를 물개로 오인하여 물개바위 (seal rock)로 기술한 것 같다.
(6) 미국 포경선 플로리다호의 기술:
1857년 3월 27일. 긴수염고래를 보았다. 오전 중에 남쪽에서 강풍이 불었다. 울릉암을 보았으며 두 척의 포경선도 보았다. 오전 10시 긴수염고래 두 마리를 발견하여 보트를 내렸는데 고래가 놀라서 달아나 버렸다. 오후 늦게 비가 왔다. 긴수염고래 4 마리를 발견하였다. 그 중 두 마리를 잡으려고 보트를 내렸으나 허탕쳤다. 오후 5시에 북서쪽에서 돌풍이 불었다. 울릉암이 10마일 떨어진 약간 남쪽으로 기운 서쪽에 있었다.
1857년 4월 7일. (중략) 배는 울릉도와 울릉암의 중간쯤에 있었는데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서 울릉암 (dagelet rock)으로 기술한 것이 독도인데 플로리다호는 해도에 있는 울릉도 (dagelet island) 는 그대로 기술하였지만 해도에 없는 독도를 울릉도에 종속된 섬으로 보고 울릉암 (dagelet rock)으로 기술한 발상이 참신한 것 같다.
이렇게 숙련된 배낭 여행자답게 박물관 전체를 샅샅이 훝고 나갈려고 하는데 이층 전시실 중간에 세워진 반뜻한 비석에 '대한민국경상북도울릉군독도'라고 한자로 새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여기 서 있을게 아니고 독도 어디쯤에 세워져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실제로 독도 동도에 가보니 그냥 독도라고 새겨진 허접한 바위판 하나가 별 폼없이 그냥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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