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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Feb 13. 2024

미국 대학 2학년, 눈 떠보니 하늘길이 닫혔다

코로나로 멘붕 왔던 2년 동안의 기억

시작은 순조로웠다

사랑받는 막내로 1학년을 마친 후 2학년이 되어 학교에 돌아가니 감상이 또 달랐다. (전 편 참조)

동아리 안에서 고속 승진(?) 느낌으로다가 부회장을 맡아 여름방학 때부터 각종 환영회 자리에서 사람들 앞에 나섰던 것이 한몫했다. 신입생들뿐만 아니라 나보다 나이가 많은 편입생, 복학생 선배들까지 카톡으로 수강 신청, 동아리 이벤트, 신입 운영진 가입 등에 대해 문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분 한 분께 답장을 드리고 대화를 이어나갈수록 아직 막내를 완전하게 벗어나지 않은 데에서 오는 편안함과 그래도 어느 누군가한테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됐다는 설렘이 겹쳐 재미있었다.

동아리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쯤 되니 학교 안은 꽤 익숙해져서 지도를 보지 않고도 어느 건물 어느 강의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지만, 샌디에이고 전체에서는 가 보지 못한 곳이 많아 주말마다 나들이 욕심이 났다. 특히 나는 새로운 음식 먹어보기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검색해 보고 찾은 맛집을 하나하나 퀘스트 깨듯이 방문하는 게 그렇게 재밌었다. 마침 그 시점에 맞춰 친한 친구 두 명이 학교 기숙사에서 근방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다른 친한 친구 한 명은 운전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다 같이 드라이브를 가거나 맛있는 밥을 먹고 달달한 음료를 잔뜩 사서 아파트로 돌아가는 루틴이 생겼다. 귀찮음이 앞서는 날엔 그냥 처음부터 아파트에서 만나 한 솥 가득 파스타를 해서 영화나 예능 하나 틀어놓고 나눠 먹는 것도 좋았다.

물론 시험 기간 공부나 동아리 이벤트 준비로 바쁠 때는 도서관에 콕 박혀있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항상 옆에 같이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재밌게 느껴졌다.

진짜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으로 가득 찬 나날이었다.

평일에는 편한 차림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스트로베리 아사이 들고 도서관 출근도장
주말에는 샌디에이고 이곳저곳 쏘다니기

그런데 그렇게 2학기까지 무사히 넘어간 시점에 갑자기, 같은 수업을 듣던 중국인 친구들 몇 명이 마스크를 쓰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방독면 수준의 마스크를 쓴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도 첫 확진자가 나타났다는 새로운 열병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코로나 (COVID-19)

2020년 3월이었을까. 전염성이 얼마나 강한지 하루하루가 다르게 확진자가 늘고 한국에서는 급기야 다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느라고 집안에 스스로를 가두어야 했을 때, 미국은 오히려 확진자 수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우선으로 걱정하고 우리는 기껏해야 달고나 커피나 따라 만들었더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샌디에이고 같은 곳에서는 전혀 느낀 적 없던 흉흉한 분위기가 주변의 유학생 친구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럼프가 대놓고 코로나를 Kung Flu(중국의 Kung Fu와 독감을 뜻하는 Flu를 접목한 단어)라고 부르는데도 이전에 그가 다른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을 때랑은 판이한, 미미한 수준의 반발이 일었다. 지금까지도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그 분위기는 미국의 확진자 수가 오르면 오를수록 조금씩 고조되는가 하더니 결국 Anti-Asian Hate의 형태로 폭발했다. 타 인종인 미국인들 입장에서 발병지인 중국만 욕하기엔 겉으로 보기에 구분이 어려우니 그냥 아시아인들 전체를 싸잡아 혐오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 중 35%가 코로나 이후로 주변인 중 폭행을 당하거나 위협을 받은 사람이 있다고 답했다.

뉴욕의 지하철과 샌프란시스코의 길거리 같은, 유학생 친구들이 언제든 지나칠 수 있던 공적인 장소들에서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했다. 결국 샌디에이고에서도 UCSD가 전면 온라인 수업을 실시하겠다고 공표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당장 내 친구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 "너희" 때문이라는 욕을 들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고, 이대로 미국에 남으면 왠지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바로 역대급 낮은 가격에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샀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여행 정지, 국경 폐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1~2주 남짓한 짧은 기간에 걸쳐 일어났으니 지금 돌아봐도 정말 현실성 없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어떡해,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갑자기 17시간 시차를 두고 온라인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보아야 한다는 막막함은 둘째치고 미국에 대한 배신감이 크게 들었다. 그렇게 자유와 다양성을 사랑하는 나라의 이면에 무질서와 폭력, 그것도 감히 약자인 노인부터 폭행하는 비열함이 있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2학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슬슬 적응을 마치고 대학 너머의 삶을 꿈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주어진 환경 안에서 연구 경험, 인턴 및 대외활동 경험을 통해 보다 명확한 진로를 설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거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어질 '미국 대학생이 “스펙” 쌓는 법' 시리즈 세 편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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