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하는 것이 남부끄러울 때
내가 혼자 충동적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친구가 부럽다고 해서 혼자 충동적으로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혼자 충동적으로 여행을 간다'는 현상이나 행동을 부러워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나의 모범적이려고 애쓰는 보수적인 성격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 원천 차단되었다면 문제일 수 있겠지만, 딱히 내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있는 행동을 시전한 사람은 없었다.
내가 또라이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 행동으로 상징되는 사고방식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행동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
나는 데이터가 있으면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고 말하는 데에 자격이 필요할 리 만무하다는 걸 알면서도, 또라이 이력이 있어야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뭐임?' 할까 봐, 부끄러울 게 싫었다는 뜻이다. 참내 난 내 성격이 이렇게 복잡한 줄은 몰랐네.
그렇지만 첫 이력을 만들려면 부끄러움을 무릅써야 했다. 평소의 나와 결이 다른 행동을 해야 했다. 처음으로 학교에 가는 것처럼, 회사에 가는 것처럼 낯선 경험을 해야 했다. 부끄럽다고 생각 말자, 부끄러운 일 아니다 생각하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등학생일 때는 공부 외에, 대학생일 때는 스펙을 쌓는 것 외에는 관심 없다는 듯 늘 점잖을 떨어왔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두고 '나 오늘부터 이거 할 거야!' 하고 선언하는 것도, '네가 보는 지금 이거, 내가 원하는 걸 하는 과정이야!' 하고 알리는 것도 부끄러웠다. 예를 들면 인스타그램 강의를 듣고 나름대로 실천을 해보겠다고 친구들과 팔로잉을 하고 있는 SNS에 셀카를 올리는 것도 기분이 이상했고, 장난스럽고 가벼운 감정 말고는 올려본 적 없는 피드에 내 감정이나 생각을 꾹꾹 담아 쓴 글을 올리는 것도 이상했다. 목표를 세워놓고 달성을 못하면 남들 보기에 부끄러워질 거 같아 걱정됐다.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서 '관종'이 되는 게 어려웠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관종'이 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또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력을 만들 수 없었다. 나는 매번 과거의 나를 복사해서 오늘의 나를 살고 있었고, 그걸 극복하고 싶었는데, 다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또라이를 롤모델로 삼았지 않은가. 내가 본 또라이들은 기꺼이 관종이 되었다. 자신의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을 공개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남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 '남들'에 소속된 나는 심지어 그들을 동경하고 있으니 시도해봐도 될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부끄러워하기로 했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내 목표를 다지고, 오글거리는 글도 쓰고, 내 소개도 했고 내 생각도 담았다. 해보니 별 게 아니었다. 그리 하고 나서 내가 확인한 것은, 역시나 남은 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남에게 그런 것처럼. 몇 번을 반복하니 조금 더 당당해지기도 했다. 당당함도 훈련이 되었고, 나를 드러내는 내가 나를 드러내기 부끄러워하던 나를 이겼다.
또라이의 길에 시작점을 찍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