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봉이 점멸기 2

by 흰머리 짐승

미처 증발하지 못한 빗방울이 공기 속에 남아 뜨거운 습기가 온몸을 뒤덮었던 7월의 어느 날, 중앙도서관을 나온 아이디 wanderer18은 도저히 이 한증막을 뚫고 버스정류장까지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서관 맞은 편 라운지에서 아르바이트 시간까지 잠깐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어차피 방학이라 수업이나 예정된 모임은 없었다. w는 에어컨 바로 아래에 있는 크림색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몸을 기대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각인된 동작처럼 능숙하게 친구들의 근황을 살폈다. 취업 원서 빈 칸을 메우기 위해 영어시험을 보러 간다는 고등학교 동창의 알림에 '대박나길... 화이팅!!'이라고 댓글을 남겼다. 아마 지구 반대편에 사는 조제(Jose)가 스페인어 시험을 보러 간다고 했어도 w는 자세 하나 바꾸지 않고 이렇게 썼을 것이다. 'Good luck... Fighting!!' 두 문장의 뜻은 정확히 같았다.

'나, 네가 올린 글과 사진 봤음'


라운지 한 쪽 벽면에 붙은 대형 프로젝터 TV에 눈을 돌리고 있을 때도, 이제 막 라운지 안으로 들어선 짧은 치마 여자의 다리를 흘끗거리는 순간에도, w의 엄지 손가락은 5인치 쯤 되는 광활한 스마트폰 화면을 종횡무진 누볐다. w는 우선 열대야를 달래줄 심야 TV프로그램과 인터넷 만화를 훑고난 뒤, 위대한 포털사이트들이 엄선하여 화면 한가운데 배치한 ‘헉’ 하고 ‘경악’스러운 기사들을 두루 섭렵했다. 이 마저도 흥미를 잃어 갈 무렵 wanderer18은 어느 1인 미디어를 발견했다.


교수님, 대통령 공부하시게요? - 20120720

어눌한 샌님이 국민을 가지고 노는 꼴이 가관이다.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 실실거리면서 윤리 책에나 나올 법한 말들만 궁시렁거리다가 사라진다. 이번에는 본인 이름을 제목에 떡 하니 단 찌라시 같은 책을 썼다는데, 이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국민들에게 검증받고 싶었단다. 자, 궁금한 사람 손? 그리고 출판 이후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대통령 출마를 고려해 볼 수도 있단다. 그러니까 이게 실험실에서 불쌍한 흰 쥐 가지고 실험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실험실에 흰 쥐 천 마리 풀어놓고, 원래 주던 먹이랑 새로운 먹이를 각각 놓아 둔 후 그 새로운 먹이 주위로 오백 한마리 이상 모이면 쥐들은 그 새로운 먹이를 더 좋아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잖아. 누가 이공계 교수님 아니랄까봐, 투철한 실험정신이다. 예전에 어느 대학 초빙 강연에서 교수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모자란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행운아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배울 일만 남아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모질이라고 자신있게 지껄이는 샌님이라 여전히 공부하고 계신가보다. 과목 이름은 대통령 되기.


아 참! 기억하는가? 샌님 당신이 5년 전에 서명한 문서를? 샌님 당신께서 직접 정부 계획대로 낙동강을 개발해도 환경에 영향 없다고 했지 아마? 그런데 말이야, 낙동강 하구에 지금쯤 슬슬 보여야 할 해오라기가 씨가 말랐다네. 지금 대통령 되는 공부는 미루시고 전공 공부나 더 하시는게 어떨는지…… 그게 샌님의 입신양명과 나라의 안녕을 위한 길인 듯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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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derer18은 아무렇지 않게 그 논평 일부를 자신의 SNS에 붙여 넣었다. 내친 김에 사교육, 청년 실업, 부동산 정책 등에 대한 냉소와 조롱을 낄낄대며 읽다가 일부는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계정에 옮겼다. 그리고는 잊었다. 자신이 그 글들을 읽었다는 사실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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