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봉은 대학 졸업 후 여러 회사에 원서를 넣었지만, 단 한 군데에서도 합격 통보를 받지 못했다. 아니, 사실 휴대전화 부품을 만드는 작은 회사에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지방이었던 탓에 퇴짜를 놓았다. 그 뒤 몇 년 동안 몇 번의 노력과 정확히 같은 숫자의 고배를 마셨고, 밥벌이를 위한 대졸자다운 시도는 중단했다. 하루 열두 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백만원을 받는 아르바이트로 세 평 남짓한 방 값을 치르고 나면, 선생에게는 일주일에 한 두 번의 외출 정도 밖에 할 수 없는 돈이 남았다. 외출 시간이 되면 이미 다른 회사에 팔려 사라진 브랜드의 노트북 컴퓨터를 가방에 넣고 대학 도서관으로 향했다. 여전히 다니던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졸업생용 출입증을 발급받기만 하면, 시간 때우기에 모자람 없는 환경이 제공되었다. 싼 값에 양껏 먹을 수 있는 밥, 시원한 여름, 따뜻한 겨울...... 선생에게는 슬픈 호사였다. 도서관에 들어선 선생은 능숙했다. 우선 1층 휴게실에 들러 삼백원 짜리 커피를 뽑아 바로 옆의 정기간행물 열람실에서 밀린 일간신문을 읽었다. 그리고는 시험 기간이 아니면 후배들이 잘 찾지 않는 눅눅한 지하 자유 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쳤다. 그 곳에서 달봉은 그 곳이 아닌 곳의, 그 시간이 아닌 시간의 세상과 소통하느라 그 세상 속에서의 자신은 잊었다. 편집증 환자처럼 읽어댔고, 정신분열을 일으킨 작가처럼 끄적였다. 도서관 지하는 달봉이 세상의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을 느끼는 유일한 자유 공간이었다. 1인미디어 '달봉선생의 열람실'은 그렇게 탄생했다. 10년 전 어느 대학 화장실 낙서계를 평정했던 달봉이 사이버 논객 달봉선생으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달봉선생 글은 정리된 사고의 표현이라기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래서 그이의 글은 돌멩이에 긁힌 자국 같았다. 선생은 쫓기는 사람처럼 일필휘지로 갈겨놓고 달아나기 일쑤였다. 달봉선생의 열람실은 파본들로 넘쳐나는 건 당연할 수 밖에. 무릇 '문(文)'이라 함은 기록 또는 표현일진대 달봉선생의 글은 그 두 가지 ‘문’의 본질과는 무관했다. 철저하게 검증된 사실이나 원리보다 그저 떠도는 풍문을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기록이 아니었고, 그가 풀어낸 생각들에서 책임감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표현 또한 아니었다. 하기야 누구나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고 그 결과물이 인터넷 망을 통해 끝간데 모르고 퍼지는 세상에서 ‘문’다운 ‘문’을 찾아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파본 취급 전문' 달봉선생의 열람실은 다시 옛 명성을 찾는 듯 보였다. 첫째, 선생의 글을 이해하는 데에 사고력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선생은 문장과 문단의 의미로 말하지 않고 단어의 뉘앙스와 동사, 형용사의 어미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의 글은 모두 읽지 않아도 선생이 의도하는 바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둘째, 선생의 글은 늘 핫이슈를 다루어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용이했다. 오늘 이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 중 가장 주목받을 만한 사건이라면 달봉선생은 예외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예전처럼 게시판을 따로 구분하기 조차 어려웠다. 아마 주제에 따라 게시판을 만들려고 하면 족히 천 개는 넘었을 것이다. 달봉의 부활을 한마디로 갈무리하면 '쉬지 않고 지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디 열심히 달리기만 한다고 순위 안에 들 수 있는 세상인가. 달봉선생이 인터넷 논객으로 추대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선생이 여느 때와 같이 어느 시점의 핫이슈를 단어의 뉘앙스로 양념하여 제멋대로의 문장으로 풀어 낸 어떤 글을 신랄한 정치 풍자를 전문으로 하는 유명한 인터넷 신문이 인용한 것이다. 기사 끝에 ‘필명 <달봉선생>은 이와 관련하여 이러쿵저러쿵 했다.’는 서너줄 사족이 달봉선생을 시쳇말로 돈지랄 없이 단숨에 파워블로거로 승격시켰다. 인용된 글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달봉선생이 '쉼없이 지껄인' 거의 모든 글들이 신종 바이러스 퍼지듯 확산의 범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삽시간에 온라인 공간을 덮었다. 달봉선생의 글 아래 사람들의 댓글은 고개 숙이고 두손 모은 신자처럼 모여들었다. 모두 집단 최면에 걸린 듯 달봉선생의 글을 찬미해 마지 않았다. 합리적 개인이 모여 맹목적 군중이 되는 모순인 셈이었다. 여하튼 언제부터인가 굵직한 사건만 터지면 '달봉선생'은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