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봉이 점멸기 4

by 흰머리 짐승

2012년 봄, 바야흐로 대선 정국이 본격화되었다. 당내 경선 참여자 후보, 경선 후보 등 소대급 인원쯤의 후보님들이 연일 특정되지 않은 청자들을 향해, 아울러 서로를 향해 ‘속뜻'을 담아 겉도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 분이 저런 말씀을 지껄였는지, 저 놈이 이런 말을 하셨는지 헷갈릴 때 쯤에야 드디어 대통령 후보 윤곽이 잡혔다. 후보 앞에 붙은 '경선' 꼬리표는 걷히고 대신 두어 명의 살아남은 자들의 후보 직함 앞에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가 전리품처럼 붙었다. 그래봐야 곧 사라질 신기루였지만...... 바로 이 때쯤 진흙탕 개싸움을 조용히 지켜보던 교수님은 난세 가운데 영웅이 등장하듯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국민들께서는 이렇게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습니다.’로 시작하는 출사표와 함께. 사람들은 교수님이 정말 이 혼란스러운 나라를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믿었으며 마루 벽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표구된 가훈처럼 교수님의 출사표를 가슴에 담았다. 교수님은 모든 면에서 이전투구 끝에 대통령 후보가 된 자들의 대척점에 있었다. 교수님은 오천만이나 되는 인구의 오천만 가지 생각을 보수와 진보라는 실체 없는 이분법으로 몰아가려 하지 않았다(딱히 교수님만의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어딜 가든 철새의 편대 비행 대형을 갖추는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교수님은 미간에 힘을 뺀 채 늘 혼자 다녔다. 무엇보다 교수님은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에 대통령이 되기 위한 어떠한 전형적 행보도 밟지 않았다. 경선 후보의 후보, 경선 후보를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자들의 관점에서는 교수님은 비행기 일등석에 무임승차 하겠다고 달려든 셈이었다.


문제는 경선 후보의 후보, 경선 후보를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자들과 그 자들을 편대 비행의 대장격으로 앉힌 자들을 뺀 사람들의 상당 수가 교수님의 일등석 항공권 티켓 값을 기꺼이 지불하고자 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이 경선 후보의 후보, 경선 후보를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자들을 매우 불편하게 했음은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다. 경선 후보의 후보 어쩌고 하는 자들 진영의 교수님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게 둘로 갈라졌다. '평할 가치가 없는 자', '언젠가는 우리와 동지가 되어야 할 자'. 두 가지 평가의 의미는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연유는 같았다. 서로들 보수니 진보니 제 아무리 각을 세워도 역시 그들은 경선 후보의 후보, 경선 후보를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자와 똘마니들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였다. 그 하나의 패거리는 교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또는 굴복시키기 위해 합심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공격하려니 약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정치 초보인 교수님에게 정치적인 공격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 하나의 집단은 서로를 물어 뜯는 법만 배웠지, 힘을 합쳐 공동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패거리가 대신 이용한 건 책임지지 않는 가장 자유로운 권력, 언론이었다.


신문과 방송은 연일 교수님에 대한 난삽한 추측 기사들을 쏟아냈고, 포털사이트 뉴스 섹션에는 교수님의 이름과 함께 '충격', '경악', '의혹'과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붙어다녔다. 사실 관계 확인 따위는 당사자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 아니 몇 시간만 지나면 사람들 기억 속에 남는 건 무시무시한 단어들 뿐임을 패거리도 자유로운 권력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교수님이 맹목적인 군중에게 대통령 후보로서 충격과 경악을 불러일으킬 만한 무언가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만 부각된다면, 교수님 잠자리 실력이 시원찮을 관상이라는 점쟁이의 말도 가져다 쓸 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의 지지율은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견고하게 비행했다. 권투 선수가 현란한 잽으로 판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는 있지만, KO승은 좀체 거두기 어려운 것과 같았다. 경선 후보의 후보, 경선 후보를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자들에게는 어퍼컷 한 방이 절실했다. 그 자들 가운데 하나가 후보 꼬리표를 떼는 순간 적어도 정부출자기관의 장 자리 하나 쯤은 기대하는 고참 의원 보좌관들은 가능하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수단을 모두 동원해 어퍼컷 한 방 거리를 찾아내고자 했다. 경찰 수사기록표 정도 열람하는 건 우스웠고 병적기록부를 가져다가 '사실과 가깝게' 추정이 가능할 만한 내용을 뒤졌다. 가끔씩은 각각 다른 후보 진영 보좌관들끼리 만나 그 동안 파악한 정보를 교환하고 스토리를 엮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퍼컷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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