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이야기
샐러드 그릇을 비운 여자는 말했다.
“네가 쓴 소설 몇 권 읽었어. 좋던데. 우리 나이 남자들이 읽을 만한 게 참 없는데…… 틈새 시장을 노린거야?”
이런! 여자는 내가 작가라는 걸 알고 있다. 방금 책방에서 쩔쩔 매는 나를 보고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제야 투잡 어쩌고 한 것을 이해했다. 나는 드러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고 여자의 말을 받았다.
“아니, 그냥 내가 제일 잘 쓸 수 있는 거라서. 그런데 오히려 여자들한테 더 잘 팔려.”
“자기 남자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건가?”
‘자기 남자’라…… 여자는 정말 변했다. 사랑이라고는 모를 것 같았던 그 여자가 변했다.
“아무리 연인이고 부부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아?”
나는 농담처럼 던졌지만 지난 날 내 답답함을 한 번쯤 헤아려주었으면 했다.
“뼈가 있는데? 아직 원망이 남은거야?”
“지난 얘기긴 하지. 근데 어떻게 오스트리아에 있어? 가끔 애들 보는데 네 소식만 못 들었어.”
여자는 잠깐 가늠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손톱으로 와인잔을 두들겼다. 나는 얼른 질문을 주워담으려 했다. 옛 연인과의 재회는 여러가지 이유로 조심스러운 법이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그런데, 그 K 말이야.”
“응?”
“순수하게 만들어낸 캐릭터야? 아니 난 그냥 그런 사람이 현실에 또 있을까 해서.”
K는 부산의 스타인가? 부산에 사는 박도, 부산에 온 여자도 K를 꺼냈다. 그런데 ‘또 있을까 해서’라니? 내가 너무 예민한가? 나는 다시 드러나지 않는 심호흡을 하고 여자의 의도를 가려내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니 얘긴 혹시 누굴 떠올리고 쓴 거 아니냐는 거야?”
여자는 입을 꼭 다물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언뜻 생각나지 않았다.
“작가의 오랜 의식이 창조한 이야기가 소설이라면 어쨌든 인물 또한 작가의 여러가지 경험이 지어 낸 관념 안에 갇힐 수 밖에 없어. 한 사람에 대한 온전한 회상이 아니고서야 모델은 대개 여러 명이겠지. 얼굴과 이름을 떠올릴 수 없는.”
그럴 듯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알맹이가 없는 순발력의 산물이었다. 하나의 일을 꽤 오래 하다보니 정치가의 화술을 제법 흉내낼 수 있다. 곤란한 질문에 질문자의 입을 막아버리는. 내 아리송한 대답을 들은 여자는 애꿎은 와인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옆 자리에 놔둔 상아색 코트를 집어 들었다.
“이제 그만 갈까? 내가 낼게.”
여자는 먼저 계산대로 갔다. 여자에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떠날 때의 뒷모습이다. 나는 계산대 반대편 창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달맞이 고개는 제 이름을 잊은 채 여자의 코트 빛깔과 같은 상아색 달빛을 밀어냈다. 여자는 K를 쓰면서 자신을 떠올리길 바랬나? 떠났어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기를 원했던 걸까? 그걸 확인하러 여기까지 찾아온거야? 참, 여긴 내가 잠깐 머무르는 곳이니까 그건 아니겠군. 여자의 등장과 K를 묻는 여자의 대담함에 화가 치밀었다. 마지막 불꽃놀이를 채 끝내지도 않고 돌아선 여자와 그 날 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계산대로 걸어가던 여자는 결국 같은 사람이었다. 여자는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이 나이에 결혼까지 한 남자는 떠난 자리에 남은 공포와 외로움 따위로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내가 마음을 준다 하여 상대 또한 진심을 돌려주리라는 믿음은 거둔 지 오래다. 라벤더향이 은은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었다가 산뜻한 리넨 이불을 덮어도 그 날 밤엔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통유리 창문 밖에 여자와 마주앉았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본 달은 보이지 않았다. ‘K...... K는 누굴까? 박은 독일작가를 만나 답을 찾아올까? 독일작가는 K를 어떻게 만들어냈을까?’ 도저히 답할 수 없는 질문 놀이에 지쳐 겨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