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열한번째

작가의 이야기

by 흰머리 짐승

박사장이 돌아오면서 나는 산뜻하게 해고되었다. 일주일 일한 퇴직금으로 박은 가족들에게 저녁을 대접한다 했다.

“오랜만이에요. 제수씨. 야, 꼬맹이들 큰 것 좀 봐!”

“아......네...... 기자님. 부산 내려오신 뒤로 통 못 뵈었어요.”

사실 박보다 내가 나이가 좀 많다. 그럼에도 박은 거리낌 없이 아내를 ‘제수씨’라 부른다. 나도 아내도 서열 정리 따위엔 관심이 없다.

“랑이, 령이 인사 안 하고 뭐해? 아저씨 기억 나지?”

이 말을 끝으로 저녁을 먹는 내내 나는 아이들을 먹인다는 핑계로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사장과 제수씨 사이도 한 시간 쯤은 웃고 떠들 정도는 되었다. 아내는 주로 이번 여행에 대해 물었고, 박사장은 여행 블로그 운영자처럼 베를린의 볼 것과 살 것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아이들을 챙기면서도 나는 박의 방향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고맙게도 박은 하지 않아도 될 얘긴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는 그 날 오후, 아이들과 아내가 백화점에 간 사이 책방에서 있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된거요? 내가 그 날은 아내랑 같이 있어서 금방 끊어야 했어.”

“작가님 그 ‘아내’라는 호칭, 참 예쁜 말인데 부자연스럽단 말야. 요즘은 다 와이프라고 하잖아.”

책방 앞 보관함에 손님들이 던지고 간 책들을 정리하며 박은 뜬금없는 농담을 건넸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독일작가가 여기에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떻게 알았어?”

“내가 떠나기 전에는 별 관심도 안 보이시더니! 왜 그렇게 궁금한건데?”

박은 변죽을 쳤다. 웃음기 없는 내 얼굴에 박은 얼른 말을 이었다.

“왜 그 날 있잖아요. 내가 두 번째 독일작가를 찾아갔던 날, 응? 리셉션에서 그이 퇴사 소식을 듣고 멍하니 있는데, 보안요원이 슬쩍 내 팔을 붙잡더라고. 내 발로 나가겠노라 눈짓하고 터벅터벅 걸어나오는데 그 아랍계 할아버지가 따라 나오잖아. 그러더니……”

“그러더니? 할아버지, 아니 보안요원이 뭐랬는데?”

“할아버지랑 독일작가가 스스럼이 없었나봐. 짐 싸서 회사 문을 나선 날 할아버지한테 그랬대요.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다고.”

“고작 그거에요?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박기자님이라고 생각하는거에요, 지금? 기자 그만두더니 무뎌졌네. 단막극 단골 레파토리잖아요.”

박은 ‘걸려들었군’하는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보안요원 할아버지가 나한테 뭐라고 물었는지 알아요?

나는 다시 눈에 힘을 주고 박을 노려봤다. 박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예언자처럼 눈을 반쯤 감고 팔을 벌린 채 낮게 말했다.

“아…… 유…… 케이, 오어 두 유 노우 케이 바이 애니 첸스?(Are you K, or do you know K by any chance? 당신이 혹시 K인가요, 아니면 혹시 K를 아나요?)? 이 정도면 어렵지 않은 추론이죠?”

그 뒤 한동안 박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박이 내 팔을 흔들 때까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듣고 있어요?”

“네? 아, 응”

“자, 그럼, 추론에 추론을 더해서…… 오케이? 독일작가는 외로웠던거야. 아니면 주류에 편입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든지. 보통 주류가 아닌 사람들끼리는 서로 기대기도 하고 그러잖아. 길고양이가 혼자 사시는 할머니에게만 정을 주는 것처럼.”

나는 잠자코 들었다. 딱히 궁금한 것도 박에게 억측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독일작가는 K에 대해 보안요원에게 얘기했고, 독일작가는 자신의 글에 K와 닮은 인물을 꺼내 놓았다. K는 독일작가의 삶에 큰 의미가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나는 휘몰아치는 감정이 논리의 합리성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여러 번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독일작가가 K를 찾아나섰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괜히 부풀리지 말자. 아내와 아이들이 탄 기차가 동강 낸 여자의 외침은 무엇이었을까? 그 장면이 하필 이 때 생각날 건 또 뭐야! 나는 여자의 갑작스런 등장을 박에게 샅샅이 털어놓았다. 달맞이 고개가 밀어낸 달빛까지도. 그리고 여자와 나의 지난 시간까지. 내 머릿 속의 퍼즐판이 박의 명석함으로 완성되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 얘길 왜 이제서야 해요! 그러니까 당신 옛 연인이 찾아왔다는 말이지?”

“나 지금 가족들이랑 같이 있다고요.”

“그럼, 처음부터 다시 맞춰봅시다.”

박은 탐정처럼 한 쪽 실눈을 떴다.

“독일작가는 작가님의 K와 아주 비슷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어요. 나는 독일작가를 찾아나섰죠. 물론 미리 알리지 않은 덕분에 놓치고 말았지만.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니 뭐 기가 막히다고도 할 수 있겠네. 그래요. 작가님의 옛 연인이 여길 찾아왔어요. 이건 우연이 아니에요. 왜 작가님이 사는 서울이 아니라 부산, 또 하필이면 내 책방이냐는 말이에요.”

나는 박의 ‘우연이 아니에요.’라는 말에 침을 삼켰다. 박은 이어갔다.

“세상에 기막힌 우연은 많지 않아요. 우연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건, 또 그 단어가 놀라움을 주는 건 확률, 그러니까 모든 일을 숫자로 읽어야만 편안한 인간의 오랜 습성 때문이죠. 몇 분의 몇, 몇 퍼센트로 계산하여 터무니없이 작은 수라고 그걸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로 여기는 건 아집이에요.”

이야기 중에 뜬금없이 자신의 철학을 펼치기 일쑤인 박의 고약한 습관을 잘 알고 있는 나는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독일작가는 이 책방에 내가 있을 줄 알고 찾아온 거란 말이에요?”

나는 차마 여자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작가님의 옛 연인인 독일작가가 작가님을 책방 주인이자 자신에게 연락한 사람으로 생각한거죠. 그러면 아귀가 거의 맞아. 안 그래요?”

나는 자신감이 차오른 박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싶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나에게 이미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게 된 이상 독일작가 사건 추리에는 한치의 오차도 쉬이 넘어갈 수 없었다.

“거의 맞긴 한데 그이는 독일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에 있다 했다고.”

박은 들이마시던 숨을 멈추었다.

“아…… 음……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독일작가라는 걸 또는 부러 찾아왔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둘러댄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박이 펼친 추론의 근간을 흔든 한 마디에 박의 목소리는 독일에서의 전화 목소리처럼 박자와 멜로디를 잃어버렸다. 박은 보관함에서 꺼내 온 책들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어? 이게 뭐지? 이거 우리 책 아닌데? 바코드도 없고.”

박은 짙은 보라색 표지에 노란 칼리그라피로 F 뭐라고 쓴 책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더니 갸우뚱했다. 잠시 책을 훑던 박은 소리쳤다.

“어? 어! 그 사람이다. 독일작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불꽃놀이, 열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