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열두번째

작가의 이야기, 그 마지막

by 흰머리 짐승

박과 저녁 식사 뒤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서둘렀다. 아이들이 이를 닦는 동안 아이들이 잠들기 전 언제나 듣는 동화 CD를 틀었다. 아내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뭐 마시려고? 나 배부른데……”

“그래? 차 한 잔 하려고 했지. 배부르면 관두고.”

나는 할 일이 있었다. 그러려면 아이들과 아내는 어서 잠들어야 했다. 가족과의 휴가에 느닷없이 닥친 방해 공작에서 벗어나려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방법 뿐이었다. 아내까지 모두 잠든 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가방에서 짙은 보라색 표지의 책을 꺼냈다. F가 첫 자인 책 제목은 ’Firework(불꽃놀이).’ 였다. 책 속에 끼워진 편지를 빼내어 읽기 시작했다.



너이기를 기대했고, 네가 아니기를 기도했어.

내 기대가 맞아들어간 건지, 누군가 내 기도를 들어준 건지 가늠할 수가 없어.

그렇다고 너를 못 잊어 찾아온 것 아닌지 하는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해. 벌써 십 년도 훌쩍 지났어.

어찌되었든 너는 나에 대한 기억을 거의 지운 것 같았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속여가면서까지, 기억할까 했는데......

그럼 비엔나 케른트너 뒷골목 교회는 혹시 기억할까? 마이크 떨어뜨린 칠칠맞은 동양 여자.

너인 것 같았어. 무엇 때문인지 잔뜩 굳어있더라. 무대 뒤에서 흘끗거렸어.

시간이 지날 수록 네 얼굴이 풀리고 활짝 웃기까지 하는데 그제서야 확실히 알아봤지.

지난 날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표정의 스펙트럼.

그 땐 그게 왜 그리도 괴롭고 힘겨웠을까?

그저 너와 나의 온도가 달랐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이 나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것이 불안하고 무서웠을까?

그 날부터 너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어. 작가가 되어 있더라.

어느 기자가 쓴 네 책 서평을 읽었어.

‘데뷔한 지 채 몇 년 되지 않은 작가는 누군가에게 큰 은혜를 입은 듯 하다. 지난 작품에 이어 등장한 K라는 인물은 앞으로 작가에게 김수현의 윤여정(윤여정은 김수현 사단의 사단장이라고 불릴 만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과 같을 것이다. 그런 캐릭터를 찾아낸 건 또는 경험한 건 분명 행운이다.’

네가 다시 교회에 찾아 온 그 날도 난 거기에 있었어. 똑같은 자리, 무대 뒤편에. K처럼.

그리고 이 책은 K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K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야.


소파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내가 자고 있는 침대가 아득했다. 때마침 한 번 잠들면 아침까지 좀체 깨지 않는 아내가 눈을 떴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아내에게 미끄러져 갔다.

“저기, 나 장편 하나를 써야 할 것 같아. 나 취재 좀 다녀올게. 내 첫번째 은인에게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 굉음에 두 동강 나서 못 들었거든. 좀 걸릴지도 몰라.”

“으……응? 뭐라는거야? 어딜 간다고?”

거스를 수 없는 영감에 사로잡혀버렸다. 계획했던 두 편의 짧은 이야기와 장편의 마무리는 아무래도 미뤄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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