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이야기
나는 그 날 밤 잠들지 않았다. 남편과 십 년 넘도록 사는 동안 내게 생긴 재주가 있다면 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졸음이 쏟아져도 결코 잠들지 않는 능력. 남편과 한 침대를 썼지만 우리가 함께 잠든 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남편이 글을 쓰기 시작한 뒤엔 더 심했다. 남편의 영감은 시도때도 없이 부부의 삶을 방해했다. 심지어 잠자리를 가진 뒤에도 남편은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면서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침대를 빠져나갔다. 차라리 침대맡에 작은 책상을 놓아줄까 한 적도 있다. 남편은 스스로 미안하지 않을 정도의 미안함을 표하며 누가 옆에 있으면 생각이 달아난다고 했다. 남편을 이해하기는 포기했다. 그래야 가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밖으로 돈다거나 나와 아이들에게 무심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나와 아이들만큼 글쓰기를 사랑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남편을 씹을 이유를 찾지 못해 가끔 화가 났다. 물론 남편은 알아채지 못하는 듯 했지만. 다시 박기자와 만난 그 날 밤으로 돌아가본다. 남편은 이상했다. 남편이 스스로 나서 아이들을 챙기는 법은 없었다. 더군다나 박기자와 만난 자리였다. 나만큼 남편을 잘 알고 있을 박기자가 남편에게 거의 한 마디도 걸지 않은 걸 보면 남편과 박기자 사이에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불과 일주일 전에 나와 통화해놓고 '오랜만이에요. 제수씨.'라니. 마치 남편과 박기자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막고 서 있는 듯 했다.
일주일 전, 남편에게 온 박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그 때 남편은 면도하고 있었다. 박기자는 내게 대뜸 집에 '불꽃놀이' 남은 게 있는지 물었다. 남편 소설을 다시 읽어야하는데 그것만 없다고 했다.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도 쉽지 않다면서. '불꽃놀이'는 남편의 첫 장편이자 전업 작가로 나서게 한 작품이다. 갑자기 나타난 옛 연인과 여행을 떠나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삼사십대 여자들의 공감과 질타를 함께 얻으며 서너 달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공감하는 쪽도 욕하는 쪽도 아니었다. 대신 남편의 상상력과 숨은 의식의 경계가 어딜까 고민에 빠졌다. 예술하는 사람의 배우자라면 늘 지녀야 하는 소양이 평정심이라고 박기자는 가끔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그 때만큼은 내 마음의 균형추가 제자리를 잃었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겠다고 한 충격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필이면 '불꽃놀이'라니, 불안했다. 불꽃놀이는 남편 상상력과 숨은 의식의 경계에서 쓴 이야기였다. 남편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전화기를 남편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남편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불꽃놀이'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