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열네번째

아내의 이야기

by 흰머리 짐승

민주는 담담했다. 사실 난 민주의 분위기라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과방에서나 가끔 마주치면 서먹함을 덮기 위해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을 한껏 열어 인사하는 정도의 사이였다. 민주는 전화로 내게 남자친구와 싸웠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내 전화번호를 안다는 것도 놀란 판에 연애 상담이라니. 책상 위에 던져놓은 폭죽이 보였다. 축제 기간에 주점 손님몰이용으로 쓰려고 준비한 것이었다.

"불꽃놀이 어때? 괜히 어색하게 대화한답시고 커피숍에서 질질 짜는 것보다 낫지 않아?"

"응, 그래. 고마워."

내가 제시한 해결책도 엉뚱하고 성의 없었지만 민주의 반응 또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제주도 여행 때도 그랬다. 민주가 왜 그 여행에 함께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돈을 아끼려고 각자 집에서 밑반찬이나 고기, 취사도구 같은 걸 훔칠 수 있을만큼 가져오기로 했는데 민주는 배낭 하나 덜렁 메고 왔다. 사과는 고사하고 멋쩍은 기색조차 없었다. 그래도 속으로 미안하긴 했는지 밥 먹을 때만 되면 사라졌다가 설거지가 끝날 때쯤 돌아와 '배가 별로 안 고파서.'라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대체 왜 왔는지, 누가 불렀는지 민주를 뺀 동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민주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아니 그 녀석 여자친구가 민주라고 했을 때 동기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십수 년을 한 동네에서 어울리던 친구의 야반도주 같았다. 정말 그랬다. 그 녀석은 민주에게로 이사가버렸다. 가끔 옛 동네를 어슬렁거렸지만 대개 이사간 새 동네로 가기 위한 길목에 불과했다. 섭섭함이 남았는지, 아니꼬왔는지 우리 동네에서 가끔 보이는 그 녀석의 얼굴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 녀석과 민주가 헤어져 그 녀석만 살던 동네로 돌아왔다. 동기들은 속도 없이 번갈아가며, 때론 한데 뭉쳐 그 녀석과 어울려주었다. 민주는 우주선과 연결이 끊어진 우주인처럼 떨어져나갔다. 원래 한 번도 품은 적 없긴 했지만...... 내가 직장에 들어가고 그 녀석과 나는 더 자주 만났다. 동기들 가운데 학교 근처를 떠나지 않은 게 그 녀석과 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졸업이 늦었다. 만기 제대한 동기들의 졸업식에도 한 해 아래 후배들의 졸업식에도 그 녀석은 한 송이씩 포장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나타났다. 청바지에 오리털 점퍼를 입은 채. 그 때 알아봤어야 했다. 초라하고 무책임하며 병신같은 모습은 왜 그리도 쉽게 잊을까? 그 무렵 그 녀석은 졸업생 출입증을 가지고 도서관에 다녔다. 졸업생 출입증은 대개 사법시험이나 공인회계사를 준비할 때 받는다. 그런데 그 녀석은 하루의 반을 책을 읽는데 보냈고 나머지 반은 소설 쓰는데 버렸다. 그 녀석 때문에 어쩌면 꿈은 원대하나 다만 게으를 뿐인 어떤 고시생은 분루를 삼켰을 것이다. 퇴근할 무렵이면 어김없이 문자가 울렸다. '언제 오냐? 밥은?' 꼭 우리 엄마처럼 얘기하지만 밥 먹자는 얘기다. 우리는 자주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회사에서 마신 커피만 해도 심장을 뚫고 나올 지경인데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녀석 때문에 늦은 밤에도 우린 커피 마실 곳을 찾아다녔다. 물론 열에 여덟 번은 내가 냈다. 그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 녀석이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웬일인가 싶었다. 밖이라고 해봐야 학교 앞이 아닌 곳일 뿐이었지만 설렜다. 그 녀석은 꽤 멋있게 차리고 나왔다. 베이지 면바지와 하얀 셔츠, 내가 좋아하는 남자의 옷차림이었다. 스테이크와 파스타는 맛있었다. 하얀 실크 블라우스에 토마토소스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포크를 쥔 오른손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모른다.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그 녀석은 놀리거나 핀잔을 줄 법도 한데 별 말 없이 나보다 더 힘을 주어 스테이크를 잘랐다.

"읽어볼래?"

"뭔데?"

"내 첫 소설."

그 녀석이 건넨 건 어느 게으른 고시생 자릴 차지하고 앉아 쓴 단편이었다. 제목은 '하늘꽃'.

"어...... 앞으로도 내 이야기들 첫 독자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어. 직업으로든 취미로든 나는 평생 글을 쓸 건데 그 때마다 나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제일 먼저 읽어 줘."

"어? 어....."

"그리고 이건 내가 선물하고 싶은 책인데, 내가 이미 몇 번 읽은거라 괜찮을지 모르겠다. 겨우 먼지만 닦아 가지고 나왔어."

그 녀석이 건넨 책은 루이제 린저가 쓴 '생의 한가운데'였다. 갑작스러운 그 녀석의 프로포즈에 나는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바닥만 한 책갈피가 빠져나왔다. 막 터지려는 듯한 폭죽 같은 것이 밤하늘에 떠 있고 그림 아래엔 앉아있는 한 사람의 뒷 모습이 있는, 누군가 손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책을 주워 식탁에 올려놓았다. 책갈피는 아무렇게나 끼워놓았다. 노란 표지의 책은 식탁에 켜놓은 촛불에 묻혀버렸다.

그 때 알아봤어야 했다. 변명을 붙이자면 나는 그 때 직장 생활 일년도 채 되지 않아 결혼의 무거움을 따질 여유도 노련함도 없었다. 작가를 직업으로 삼을 생각인 남자와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은 나와 다른 세상에서 헤매리라는 걸, 그리고 그런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생의 한가운데'를 선물한 것도 험난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으니 니나 부슈만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나? 결혼하고 몇 년 안되어 막상 그 녀석이 회사를 그만두고 글만 쓰겠다고 했을 때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숨을 삼켜가면서도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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