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후 아버지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기에 담담한 척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이제 더 이상 기저귀가 두렵지 않았다.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던 일이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사람은 결국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그동안 그 단 하나의 장벽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을 받았던 상급병원에서는 한 달이 지나자
“요양병원이나 재활병원으로 전원 하라”라고 했다.
막막했지만, 나는 아버지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코로나로 일도 끊긴 상황이었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요양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병명으로 재활이 가능한지,
가족 간병이 허용되는지,
본가와의 거리가 가까운지,
병원비는 감당 가능한지까지…
수십 통의 전화를 걸고, 여러 곳의 상담을 받았다.
상급병원에서 한 달 넘게 간병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건 샤워와 세탁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집 근처, 익숙한 곳으로 결정했다.
낯선 도시를 떠나 본가 근처로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놓였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전화상담 때 들었던 이야기와는 너무 달랐다.
오후에 도착했는데, 우리 부녀는 병실 안내만 받은 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저녁 식사가 나와도 아무 설명이 없었다.
눈치껏 식사를 챙기고 짐을 정리한 뒤, 우리는 그렇게 첫날밤을 맞았다.
다음 날 오전에서야 간단한 병원 소개를 들었다.
하지만 의사나 간호사는 아버지의 병명도, 복용 약도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내가 먼저 요청해야 했다 — 재활치료, 식사, 약, 심지어 병원 환자복까지
결국 저녁에 입원상담 직원을 만나 항의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변명뿐이었다.
그 병원에서는 오래 머물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전에 알아보았던 병원 중, 집과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365일 재활 가능하고 가족 간병이 가능한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새 병원에서도 모든 게 익숙해지는 데엔 시간이 걸렸다.
기저귀를 갈아드리는 일, 식사를 돕는 일, 밤에 뒤척이시면 일어나서 살펴보는 일
하나하나가 낯설고 서툴렀다.
특히 비슷한 병으로 가족 간병을 하는 어머니들 틈에서 지낸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보며 물었다.
“왜 딸이 간병해요? 엄마는?”
“결혼은 안 했어요?”
“형제는 없어요?”
“아버지는 무슨 병이세요? 왜 말씀을 못 하세요?”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간병으로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들의 호기심 섞인 질문은 내 피로한 마음을 더 흔들었다.
아버지 곁을 지켰다.
요양병원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며,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와 소통하려 애쓰며,
그렇게 아버지와 나의 요양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