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하실 때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무사히 도착하셨고 따뜻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사진이 올라온다.
동생은 결혼 후 태국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 열에 아홉 명은 "태국 사람이랑 결혼했어요?"라고 묻는다.
20대 때 일찌감치 태국에 자리 잡은 제부는, 성인의 시간을 줄곧 그곳에서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회사였던 법인에 다녔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지금은 가족이 되었다.
동생이 먼저 결혼했는데 그전까지 나와 함께 살았다.
5남매 중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고등학교에서 1년이었지만 기숙사도 같은 방을 썼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서로의 친구나 주변 사람들에 대해 잘 알았다. 그랬던 게 서울 올라와 같이 자취하게 되니 더더욱 특별한 자매가 되었다.
퇴근 후 우리는 음식을 곧잘 만들어먹곤 했다. 주로 차리는 건 동생, 나는 설거지 담당이었다. 동생은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매일매일 먹고픈 게 샘솟았다. 딱히 먹는 데 욕심이 없었던 나는 "오늘은 뭘 먹을까?"라는 질문에 많은 고민을 해야 했지만, 동생은 때때마다 색다른 메뉴, 생각지도 못한 음식들을 나열하곤 했다.
그날은 밥 잘 먹고 둘이 나란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적당히 배불렀고, 누워있자니 나른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빨간 토마토 하나 먹으면 딱 좋겠다아."
보통은 식사 후 후식으로 과일을 먹지만(토마토는 야채지만), 그날은 냉장고가 비었었다. 그렇다고 다시 차려입고 가게까지 나갈 만큼의 열정은 없었고.
"그냥 자, 내일 먹어."
"먹고 싶은데..."
그렇게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동생이 좀 조용하다 싶어서 얼굴을 들여다보니 그새 잠들어있었다. 그때 어떤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틀어두었고, 거기서 쏟아지는 소음과 현란한 화면을 무심히 보고 있었을 뿐.
"악! 뭐 해!!!"
겨드랑이 아래께쯤에 웅크리고 잠들었던 동생이 머리를 받치고 있던 내 팔뚝을 엄청 세게 물었다.
앙! 꾹!
놀라고 아파서 당황한 나와는 달리 동생은 아직 비몽사몽 중이었다.
"뭐 하냐고?"
"어? 분명 토마토였는데... 아니네."
와, 이렇게 황당할 수가. 내 팔뚝은 길고, 토마토는 동글동글하고 빨간데 헷갈릴 게 따로 있지. 그런데도 태연하게 뒤돌아서 다시 잠드는 동생. 기가 차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 일로 다짐 하나는 했다. 앞으로 먹고프다는 게 있으면 꼭 사 먹여야겠다고.
이제는 동생도, 나도 각각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이 있다. 일 년에 한 번은 만나는데 지난 여름,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는 아이들 성화에 이 얘기를 꺼냈다. 애들이 자지러지게 웃고 난리가 났다. 조금은 엄하게 느껴졌던 이모에게 그런 면이 있다니 한껏 친숙해진 모양이다.
"이모, 이모가 입을라고 산 옷을 엄마가 먼저 입고나갔다면서요. 그리고는 꼭 빨간 양념 같은 거 묻혀오고."
같이 웃던 조카가 내 말에 힘을 보태는 증언을 해왔다. 동생도 태국에서 아이들에게 종종 나와 살며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했었나 보다.
들어보면 자매들끼리 있음 직한 새 옷이나 신발 쟁탈전이지만 이제는 서로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살았던 시간을 기억하는 거다.
사실 나는 토마토를 아주 좋아하진 않는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학교식당을 이용해야 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5월인가. 6월쯤인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때쯤, 학교 식당엔 방울토마토가 산더미처럼 쌓인 대접이 테이블마다 놓였었다. 그것도 매일!
학교에서 우리의 영양을 생각해 준비한 것은 아니었고 친구네가 시설농사로 비닐하우스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배한 것이었다. 말짱한 건 상품으로 팔고, 물러터지거나 크기가 작거나 색이 안 이쁜... 그러니까 불량한 방울토마토가 우리 식당으로 매일 배달 온 것이다.
맛이나 영양적인 측면에서는 판매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지만, 매일 먹는 것이 지겨웠고 식당에 들어서면 비릿하게 코끝을 맴도는 냄새가 싫었다. 입술의 하얀 딱지를 떼다가 과해져서 피까지 나면, 입안으로 스며들어 짭조름하면서도 비릿한 그 피맛 같은 냄새나 맛이 있었다.
문제는!
그 방울토마토를 하는 집의 딸이 나와 제일 친한 베프였다는 것! 매일, 삼시세끼 같이 식당에 갔는데 그 친구 때문이라도 방울토마토를 먹는 데 게을리할 수 없었다. 질린 내색도 당연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평생 먹을 토마토를 그때 다 먹은 기분이다.
따로 과일이나 야채를 챙겨 먹을 수 없는 형편에 그렇게라도 먹었으니 정말 감사할 일이지만, 토마토에 있어서는 총량의 법칙을 그때 다 채워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