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때문에 몹시 곤란한 사람의 이야기
지난 봄에 시작한 요가 지도자 과정이 얼마 전 끝났다. 11주 동안 매 주 10시간 수업에 총 200시간 수련 시수를 필수로 채워야만 자격증이 나오는 코스라 웬만한 각오로는 시작조차 하기 힘들다. 일이 바빠서, 몸이 아파서, 급한 사정이 생겨서 등의 핑계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이미 여러 개의 자격증이 있지만 이번에는 시작부터 각오가 남달랐다. 몇 년 주기로 마음이 허할 때면 몇 백만원 씩 들여 비슷한 자격증을 따고 이내 서랍 속에 쳐박아 두길 반복했었다. 자기만족형 돈지랄은 이제 그만하겠노라, 이번 과정을 마치고 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요가 강사가 되겠다며 그 어느 때보다 굳은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과정을 함께 듣는 도반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막연히 30대 언저리의 젊은 친구들, 요가 강사 커리어를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 혹은 이미 수업을 지도 중인데 좀 더 깊이 공부하고자 하는 강사님들이 주를 이루지 않을까 짐작했지만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갓 아이를 낳고 몸도 덜 풀려 양 손목에 아대를 한 초보 엄마(그녀는 출산휴가 중인 간호사라고 했다), 전북 고창에서 오직 이 과정을 듣기 위해 중학생 아들과 남편을 두고 서울에 올라온 40대 주부(이 분 역시 이미 훌륭한 전문직 커리어 갖고 계심), 체육교사 임용을 준비중인 30대 초반의 청년, 곧 결혼과 이민을 앞둔 예비신부, 센스 만점의 패션감각에 귀여운 그림과 스토리를 연재중인 웹툰 작가 등 직업도 연령도, 출신지도 제각각 다채로웠다.
접점이라곤 요가를 좋아한다는 것 밖에 없는 이들이 한데 모였지만 가까워지는 데는 그리 큰 노력이 필요 없었다. 함께 땀흘려 수련을 하고, 꾸벅꾸벅 졸며 명상을 하고, 요즘 내 삶의 고민을 쏟아내고 들어주고, 함께 커피를 마시고 김밥과 떡볶이를 시켜 먹으면서 불과 얼마 전까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타인들이 금새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다.
수업은 항상 명상으로 시작했는데 우리는 선생님이 그 날 던져 주시는 화두에 따라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미 오랜 시간 습으로 굳어져버린 내 사고의 패턴이 뭔지, 어떻게 하면 같은(그래서 매번 후회하는)선택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했다.
5분 내외의 짧은 시간동안 눈 감고 내 숨소리와 호흡에만 집중하려는 노력을 반복 했더니 어렵게만 느껴졌던 명상도 할 만했다. 항상 어지러웠던 머릿 속이 명상을 하는 잠시나마 잠잠해 졌고 내 안에서 고요와 평화로운 마음이 솟아 올랐다. 늘 해야할 일에 쫓기며 아둥바둥 살다가 주말에 모여 함께 요가하는 이 시간에야 비로소 깊고 큰 호흡을 할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매번 서로 짝 지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 상대가 누구건, 주제가 무엇이건 상관 없이 다들 이야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다는 거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렁그렁 눈물부터 한가득 차 오르는 상대를 보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나이 성별 불문, 결혼이나 자녀 유무 상관 없이 그냥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엉엉 우는 지경이라 이쯤이면 이 사람들 작정하고 울려고 여기 모인건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들인지 아니면 이 장소가, 분위기가 저절로 눈물 흘리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 건지 궁금했다.
요가 외에는 그다지 공통분모가 없는 사람들, 이 과정이 끝나고 나면 굳이 딱히 볼 일 없는 관계. 그래서 어쩌면 서로에게 깊이 생각 않고 부담없이 솔직하게 깊은 속마음을 툭 털어놓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잘 울지 않는다. 좋고 싫은 감정은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내지만 남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건 다른 얘기다. 너무 감정적으로 보일까, 히스테리 부리는 것처럼 보일까, 나이 들어선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싶어 참고 또 자제한다. 그래서 이렇게 솔직하게, 얼굴 근육이란 근육은 있는 힘껏 구긴 채 엉엉-때론 콧물까지 흘리면서-우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움에 달래주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참 용감하구나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구나 싶어서.
나는 언제 우는가? 뜬금없이 오래 전 재밌게 봤던 '1리터의 눈물'이라는 일본 드라마가 생각났다. 너무 예쁘고 앞날 창창한 소녀가 그만 불치병에 걸려 죽음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스토리였는데 웬만한 드라마는 장르별로 다 섭렵한 드라마 광인 내가 봐도 어찌나 슬프고 애절한지 꼭 드라마 제목처럼 눈물을 1리터는 흘린 것 같다.
이 드라마 말고도 내가 단골로 눈물콧물 짤 콘텐츠는 널렸지. 가슴아픈 혹은 기구한 사연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나 사연이나 안타까운 뉴스를 접할 때는 1초만에 줄줄 눈물이 흐른다.
일상에서는 길 가는 만삭의 임산부를 볼 때 얼마나 힘들까 싶어, 다섯 살 내 아이와 비슷한 또래 아이들만 봐도 애처롭고 너무 귀해서, 꼬부라진 허리로 느릿느릿 횡단보도를 건너는 할머니의 고단함이 느껴져서, 공부 하느라 찌들고 지쳐 보이는 수험생의 얼굴이 안쓰러워서, 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군대 보낸 아들 걱정하는 어느 엄마의 인터넷 카페 글을 읽을 때는 내게도 닥칠 일이라(한 15년 후에) 주책맞게 줄줄 눈물이 난다.
써놓고 보니 나는 타인에 대해서는 과한 공감으로 눈물을 곧잘 흘리지만 스스로를 위한 눈물에는 아주 인색한 것 같다.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나를 위해서는 잘 울지 못(안)한다.
몇 년 전 아빠가 울면서 전화해 엄마의 암 소식을 전했을 때도(이제는 완치되셨지만) 나는 같이 울기보다는 기를 쓰고 담담한 척하며 아빠를 달래는 한편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수술과 치료에 대한 계획을 세우느라 머릿 속 계산기를 바쁘게 돌렸다
사실 속으론 전화통을 붙잡고 아빠랑 같이 엉엉 울고 싶었다. 엄마가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나 너무 무섭다고 소리 높여 통곡하고 싶었지만 나마저 약해지면 안 된다는 마음에 감정을 꾹꾹 눌렀다.
엄마가 수술을 할 때도, 힘든 치료를 이어 나갈 때도, 그 후에 이번엔 아빠가 아프시거나 집안에 이런저런 우환이 있거나, 애정을 갖고 몇 년간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관두던 날에도 서운함을 표시하거나 울지를 못해서 그냥 웃었다. 쿨하게, 가볍게, 별거 아니란 듯이. 속으로는 헤어짐이 서운해 누구라도 붙잡고 엉엉 울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온갖 것들에 주책맞을 만큼 과잉공감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을 위해서 우는 건 왜 안 될까?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성향이 크게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매사에 '최선' '노력' '열심' 이란 단어를 습관적으로 남발하면서 안깐힘을 다해 살면서도 나는 늘 스스로가 성에 안 찬다. 누가 나를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질색팔색 하면서 부정하고 깎아 내리기 바쁘다.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써야 해, 경단녀가 되면 안되는데, 아이 나이에 걸맞은 학습 육아 훈육 모두 놓치지 않아야 해, 일정 체중을 유지하고 건강도 잘 챙겨야 해, 노후 대비도 잘 해야 하는데 등등 머릿 속에 수 십가지 고민을 가득 담고 발 동동 구르며 산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내가 대견하기는 커녕 저만치 앞서서 나보다 더 잘 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항상 비교하고 내가 모자라다고 느낀다.
나를 대충 아는 사람들은 내가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자존감, 자기애 충만한 사람인 줄 안다. 사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내가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그런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중이다.
지난 석 달여 간 요가 지도자 과정을 들으면서 내면을 들여다 볼 기회가 많았기도 했고 내 감정이나 고민에 대해서도 동기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니 나는 나를 더 사랑해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 좋은 점을 칭찬하면 굳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는 대신 가볍게 '좋게 봐줘서 고마워' 라고 말하면 되는 거다. 그리고 그런 나를 뿌듯해 하고 격려해주고 더 좋은 사람이 되면 되는 거다.
또 이제는 필요할 때 나를 위해 울어주려 한다. 안 해봐서 쉽지는 않겠지만 우선 혼자 있을 때 살살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 있는 힘껏 얼굴근육을 일그러뜨려 눈치 보지 말고 엉엉 우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고 나면 정말 시원할 거 같다. 그리고 한결 내 자신이 더 애틋하게, 사랑스럽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2023년 봄 매트 위에서 만난 내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