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여대 무용과를 졸업한 Y는 학창 시절 수려한 외모만큼이나 자주 남자친구가 바뀌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디지 못했다. 누군가 그녀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주지 않으면 마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괴로웠다. 그녀는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조차 너무 다가오면 답답하고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불안해서 누구와도 제대로 관계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남자친구는 '너에게는 연인이 아니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다'라는 쓴소리를 남기고 그녀를 떠났다. 이 순간이 두려워 항상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는데 마지막 이별에서는 머뭇거리다 그녀가 한발 늦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다. 그의 말투는 항상 따뜻했고 마음은 늘 포근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예민해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녀가 섬세하고 배려심이 많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이런 그가 떠나버릴까 두려웠고, 조금 지나자 그가 갑자기 사고라도 당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했다. 차라리 헤어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이별을 통보했을 때, 그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상처받지 않으려고 먼저 상처 주었던 과거의 경험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례에 앞서 언급한 존 볼비의 ‘애착 이론’이나 프로이트의 ‘초기 아동기 결정론’에 따르면 아동기 애착 형성에 실패한 사람은 평생을 ‘관계 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현실은 이론과는 사뭇 다르다. 사례에서 그녀의 남자친구는 홀어머니와 단둘이 유년기를 보냈다. 유복한 가정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란 그녀의 가정환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불안정한 어린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 사람들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는데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아들러의 ‘목적론’은 이와 같은 프로이트 ‘원인론’의 한계를 잘 설명해준다. 아들러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주어진 환경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사람은 매 순간 목적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면서 성숙해간다. 여기에 최근의 뇌과학 연구가 더해지면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뇌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
마찬가지로 '불안정 애착유형'이 이미 자리잡은 이후에도 애착유형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 깊이 신뢰할만한 사람과의 새로운 관계 경험을 통해 인간의 애착 시스템은 서서히 기존의 것을 허물고 새롭게 구성되기 시작한다. 실제 연구에서도 ‘불안정 애착유형’을 보이는 성인의 30% 정도가 연인이나 친구로부터 관계맺는 방식을 의식적으로 모방함으로써 기존의 애착유형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밀한 관계에서 얻은 정서적 안정감은 정서지능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관계를 맺는 능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뇌 신경 가소성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자극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특히 가까운 관계에서는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면서 성장과 쇠퇴를 반복한다. 부모의 안정감은 자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자녀를 ‘안정 애착’을 가진 아이로 키워낼 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인 가족간의 따뜻한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가까운 사람들과 안정적인 관계를 경험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도 안정적인 유대감을 공유할 수 있다. 어디서든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