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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Oct 19. 2019

빗속 맨발로 걷기

 신발을 벗었다.  한 발을 든 채 엉거주춤 서서 벗는 양말 속에서 따스한 온기를 품은 맨발  마지못해 나온다.  사각사각 내리는 빗방울을 낮게 담은 땅바닥의 홈들 위로 새하얀 맨발이 짝 긴장한 채 첫발을 딛는다.  생각보다 차가운 질감에 온기 속 잠들었던 발의 촉각이 반 깨어난다.  부드러운 쿠션으로 보호받던 맨발은 단단한 보도블록의 힘에 긴장한다.  과장하자면 태고의 원시적 유전자가 조금씩 깨어나는 기분이다.  그 시절 나무껍질처럼 딱딱한 발바닥으로 돌부리와 나무 둥치를 건너뛰던 선조에 대한 기억으로 문명 속에서 화된 발바닥의 존재감이 잠시 꿈틀거린다.


  조금 걷다 보니 점차 바닥의 거침에 익숙해져 처음 같은 긴장감은 사라지고 상쾌한 이물감이 기분 좋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는다.  거친 자갈돌 길이 나타나자  자연은 여린 내 발바닥을 거침없이 압박한다. 방금까지 문명이 준 평한 길에서 원시적 유전자를 운운했던 거만했던 나는 원시를 닮은 자연의 길에서 조금 겸손해졌다. 발끝을 바짝 세우고 발바닥 통증을 견뎌보려 하지만  보드라운 발바닥은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발끝 자꾸 오그린다.  그리고 자꾸 돌이 없는 흙길을 찾아 허공을 휘젓 빗물로 생긴 작은 도랑에 부러 발을 내딛는다.  신발을 신었다면 더러움과 젖음으로 피해갔을 그 흙탕물 속  보드라움이 맨발에게는 이다. 연과 문명은 결국 상극이다.


  출렁다리가 나타났다. 하늘에선 점점 굵은 빗줄기가 직선 머리 꽂히고, 발 아래선 거센 대청천 물소리가 곡선으로 귀휘감는다.  나무 조각을 촘촘히 덧댄 출렁다리에 발바닥이 닿으니 흙 다른 축축하면서도 따뜻 나무의 질감 묘한 느낌으로 맨발의 촉감을 따라 머리 끝 신경까지 올라온다. 그 감촉 빗소리, 물소리의 삼박자는 나를 또다시 원시의 숲에 내려놓고 간다. 휘청거리는 출렁다리의 리듬이 익숙지 않아 가벼운 흔들거림에도 움찔거리면서  태고적부터 앓아온 인간의 고뇌를 발아래 강물 속으로 흘려보내 본다.


   그렇게 흙길과 돌길, 도랑, 출렁다리를 건너고 밟으며 맨발의 태고인이 도착한 곳은 뜬금없게도 현대식 최신 사찰이다. 일행은 금빛 찬란한 불상 앞에 108배를 올리고, 나는 이들의 염원 뒤에서 바라보며 그 마음에 나의 감정을 연결해 본다.  고 속 원시인이 숲의 끝에 무사히 도착하고 올렸을 제단의 기원과 다르지 않을 마음이리라. 여느 카페와 다름없는 사찰의 찻집에서 우리는 울리지 않게 아인슈페너와 와플을 먹으며 발바닥의 감촉 따위를 잊었다. 태풍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뉴스와 함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는 길은 어두워져서 신발을 신기로 했다.  신발을 신으니 멀게만 느껴졌던 그 길이 금방이다. 발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돌을 요리조리 피하며 흙을 밟던 나는  발 밑이 어떤는 안중에도 없이 돌부리를 거침없이 뭉개며 빠르게 걸었다.   그렇게 발바닥의 감각은 문명 속에 다시 잠들었고 나는 감흥 없이 앞만 보고 내려왔다.


  맨발로 걷자고 제안했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맨발로 걷는 것은 땅에 발을 밀착하면서 땅의 콘센트에 발을 접지하는 것이. 그래서 흙과 땅과 자연의 에너지를 내 몸에 연결하는 것이라고 해."


  무감각할  같던 내 발바닥의 감각들이 이렇게 숨 쉬듯 살아나 크게 소리치는 것이 놀다.  가장 낮은 곳에 숨어 없는 듯 살던 발바닥의 감각들이 자연 속에 던져지자 발바닥 끝에서부터 몸의 신경 다발을 타고 올라와 온 몸에 대고 와글와글 수다를 떠는 것이다.  양말과 신발에 감싸여, 또는 부드러운 방바닥 위에서 박제되어 말을 잃었던 발바닥 촉수들이 오래전 풀과 돌과 흙을 밟으며 살아가던 강인했던 제 과거를 기억해 내고 추억을 들려주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의 발은 온기 품은 양말 속에 다시 숨어 태고의 꿈을 잊고 말도 잃었다.  알록달록 현란 운동화의 행렬 속에 혼자 뽀얀 발을 드러 용기가 없다. 겨우 발바닥 하나 드러내고 걷는 것이 무슨 용기고 단단히 일러보지만 발바닥은 제 모습이 부끄럽다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문.  왜 인간의 발은 땅을 잊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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