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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Feb 07. 2020

엄마의 세상이 필요하다

엄마가 주간 보호 센터를 다니면서

   토요일에도 엄마는 주간보호센터를 간다. 토요일까지 가면 국가지원금이 부족해서 개인부담금이 늘어나지만, 우리에겐 달콤한 휴일이 엄마에 여전히 겹겹의 무위들이 둘러싼 막막한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노인이 되면 겪는 4대 고통. 빈곤, 고독, 질병, 그리고 무위.

 몰랐을 때는 이 중에서 무위가 가장 만만해 보다.  아픈 데가 없고 가족이 곁에 있고,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으면 할 일이 없는 정도는 뭐 괜찮지 않나 했다.  열심히 달렸으니 이제 좀 쉬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쁜 일상을 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무위와 노인의 무위는 사뭇 다른 것이다.  산책을 가기 위해 아파트를 나서면 아파트 화단에 한 할아버지가 가끔 앉아 계신다.  겨울 햇볕이 잘 드는 화단 낮은 울타리에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거나 허공 위 먼 곳을 물끄러미 바라다. 그 앞을 지나치며 나는 생각해 본다.


 ' 며느리와 단 둘이 있는 한낮의 집이 불편했을까? 그래서 바깥으로 일단 나왔지만 딱히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것일까?  그래서 양지바른 화단 울타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 사이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떠올리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닐 수도 있지만 할아버지의 무표정속에 잠겨있는 쓸쓸함은 나의 상상을 신빙성 있게 만들었다


   년의 무위 그렇게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 느끼도록 자신을 휘감는다.  그래서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다들 즐겁고 바쁘고 오로지 나만이 쓸모없는 나무토막처럼 무력 느낀다.

이처럼 노년이 되면 누구나 겪는 무위이지만,  치매라는 병이 주는 무위는 더욱 고약하다. 노년의 무위가  관계성을 앗아간다면 치매로 인한 무위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관계성 걷어간다.


   주간보호센터에서 돌아온 오후 5시부터 엄마는 수시로 나를 찾아 이 방, 저 방 다닌다. 그리고 무한 반복 질문을 한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느냐?" "내일은 무엇을 하느냐?"

  더 이상 이해되지 않는 텔레비전 속 소음 저 혼자 흥겹게 울려대는 스피커 속 트로트 음악이제는 엄마의 무위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가족들은 자신의 휴대폰에 얼굴을 파묻고 각자 거실과 방에 널브러져 있고, 엄마는 흩어진 가족들 사이를 오가며 '나는 무엇을 할까?'를 묻고 다닌다. 회색빛 네모난 벽면에 둘러싸인 느리고 느린 시간 속에서 엄마는 만의 세상을 살고 있다. 그렇게 자존심의 성문을 단단히 닫아걸고 세월의 힘도 이겨낼 듯했던 엄마도 무위의 기세에 결국 주간보호센터에 가다고 하셨다.  얼마 전까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그런 곳에 절대 가지 않겠노라 노발대발하시더니, 이제는 재밌다고 토요일도 가겠다고 는 것이다.  


   가끔 소파에 앉아 있는 엄마의 흐린 눈빛을 보면 내 가슴 슬픔이 일렁인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얼마 전까지 분명 하던 일인데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져버린 엄마의 기분이 느껴진다. 아직 스스로에 대한 강렬한 존재감은 그대로 분명한데, 자신의 의미는 작아지는 기분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겪어야 하는 허망한 감정, 무위. 이 감정이 문득문득 자신을 나락으로 떨뜨리는 느낌이 엄마의 눈빛 속에서 묻어난다.  


    그렇게 엄마가 주간보호센터를 다니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의 경계선에서 뭔가 뜻대로 되지 않고 누군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느낌이 들면 예민하게 대립각을 세우며 그렇게 소한 것에도 서러워하고, 예전 일들에 대한 서러움을 수시로 소환하, 없던 일도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내어 분노하였던 엄마가 그렇게 하루 종일 이어지던 하소연과 분노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온순한 아이처럼 말없이 나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느 날부터 화난 할머니를 보지 않게 된 아들은 할머니가 좋아진 것 같고 기뻐하지만, 나는 왠지 우리 엄마 같지 않고 허깨비 같은 모습에 서러움이 수시로 북받친다.  수시로 내 가슴을 찌르는 말을 던져 나를 힘들게 하더니 이제는 그저 순한 아기처럼 내 손을 잡고 말없이 걷기만 하는 것이 더 마음 아프다.  


  " 엄마, 경로당 재미있어?"

 " 응"

 "그럼 내일도 경로당 갈까?"

 " 응."

 주간보호센터를 경로당이라 여기며 짧은 대답을 할 뿐인 엄마.  자신의 존재감을 지키던 파수꾼 같던 엄마의 예민함은 사라지고 말없이 온순한, 아니 세월에 달관한 도인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주간보호센터에서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노래도 부른다. 며칠 전에는 <입춘대길>이라는 문구를 쓴 종이 액자를 만들어 와서 자신의 방문에 걸어 놓았다. 그렇게 엄마에게도 뭔가가 생겼다. 아무것도 할 수 던 켜켜이 쌓여가던 하루하루 먼지 같던 무위의 시간 뭔가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간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과 다른 공간이, 그리고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의 관계가 있는 작은 사회가 생겼다.

 그렇게 잔물결 하나 없이 잔잔하던 엄마의 무미건조하던 생활에 작은 리듬이 생겼다.  소리와 움직임이 사라진 사각의 시간 속에 갇힌 듯 버텨내던 엄마의 세상에 이제 갈 곳이 생겼고, 움직임과 변화가 있는 공간과 관계가 조금 만들어졌다.


  사람은 가족 말고도, 집 말고도 나의 세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게 엄마에게는 주간보호센터이다. 그래서 마음의 짐 중 작은 조각 하나를 덜어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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