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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Nov 07. 2019

아, 제발 오해는 마십쇼❷

천일동안의 탱고, 그녀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나(5)

언젠가 연습 중에  블랑카는 그녀에게 말했다.

-모란님, 실력 있는 땅게로와 추는 게 반드시 좋은 건 아입니더.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실력차가 너무 나기 때문에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거든요. 실력이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조금 잘하는 땅게로와 추는 게 훨씬 도움될 걸요, 예를 들면 저 같은 사람이 딱 좋습니더.

이 말을 하며 블랑카는 웃었다. 모란도 따라 웃었다.

-걷는 연습은 꼭 저랑 함께 합시다. 탱고에서는 걷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거 알지요?

어쩐지 모란은 ‘꼭’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조금 설레는 듯도 했다.
  
밀롱가에서 블랑카는 모란에게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갑니더.

원래 시시콜콜한 일상들을 말하는 성격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란은 그 말의 마침표 뒤에 뭔가 다하지 못한 말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모란은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지? 유령 같기도 하고 그림자 같기도 한 이거...혹시...

언젠가부터 그녀가 춤을 추고 있을 때 블랑카의 시선이 모란을 좇고 있다는 걸 눈치챘었다. 한 번은 플로어에서 춤을 추던 모란의 발이 다른 땅게라의 힐과 부딪혔는데 춤을 멈추고 아픈 기색을 감추고자 그녀가 대상 없는 웃음을 웃었을 때 홀에 앉아있던 블랑카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블랑카는 괜찮냐는 눈짓을 했다. 춤이 끝나고 그녀가 홀에 돌아와 앉자 그는 모란에게 다가와서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물었다.

-아까 하이힐에 심하게 부딪히는 것 같던데 개안습니꺼?




- 그 남자 닉네임이 뭐라고? 블랑카? 냄새가 쪼매 난다. 모란이 니한테 관심 있는 거 아잉가?


-그쟈? 나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남자가 마지막곡이 나오기 전에 내한테 뭐라는 줄 아나?


-뭐라카든데?


-마지막 곡은 꼭 자기하고 추자는기라. 탱고 판에서 마지막 곡을 누구랑 추는 가 하는 거는 쪼매 의미가 있거든. 고정 파트너가 있는 사람은 꼭 파트너 하고 추고, 파트너가 아니라도 마음에 둔 사람하고 추드라고.


-잘 살펴보그라. 신호가 오믄 적당하게 응답도 해주고. 우리 모란이 잘 되야 될낀데.


-알긋다.




일주일 전이었다.  여느 때처럼  모란은 탱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어, 오늘따라 모란님 자세가 영 안좋네예. 피곤한갑지요? 

-모란님, 축을 세워봐요, 축을. 비틀거리네 자꾸....

그날따라 자세가 좋지 않다는 지적을 동호회 선배들로부터 유난히 많이 받았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무거웠다. 열심히 한다고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또다시 알게 되니 나이 때문인가 싶어 모란은 의기소침해졌다.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블랑카에게 카카오톡으로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몸이 무겁더라고요.

삼십 분쯤 지났을 때 답이 왔다.

- 항상 좋을 수는 없죠.


- 연습을 많이 한다고 다 잘할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아요.

- 당연하죠. 모두가 똑같이 잘할 수가 있나요.

어쩐지 모란이 얼음에 둘러싸인 듯 느껴졌다.

-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되니 짜증이 나네예.


한참 뒤 그로부터 답이 왔다.

- 모란님, 지금 자정이 넘었는데 안 잘 건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쨍그렁하고 깨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밀롱가 시계는 8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늘 정각에 탱고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블랑카였다. 결국 그날 블랑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그러니깐 모란이 쨍그렁 소리를 들은 그날 이후 블랑카를 한동안 볼 수 없었다.


얼마 뒤 블랑카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옆에는 왕초급 강습에 들어왔던 여자 신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블랑카는 모란의 눈을 애써 외면했다. 어쩌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경멸하듯 모란을 쳐다봤다. 모란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왜 그런 눈빛을 보내는지. 그렇게 친절하던 블랑카가 왜 하루아침에 변했는지. 게다가 블랑카와 모란 사이에 얼굴 붉힐 만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자정 가까운 시각, 모란이 카카오톡으로 말을 건 게 전부였는데.


모란은 오십이 넘어도 사람의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전초전에 불과했다는 것을 모란이 알리는 더욱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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