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저녁을 탱고 스튜디오로 출근하다시피 한 모란을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건 4-5개월쯤 지나서부터다. 왕 초보반 등록을 한 예닐곱 중 강습기간 8주가 지나면 기껏해야 한두 명 살아남는 것이 보통이었다. 첫 수업 때 그렇게 의욕적이었던 사람들은 햇빛 아래 말라가는 야채처럼 한 주 한 주 눈에 띄게 시들어갔다. 그러다가 결국 모습을 감췄다.
모란은 매우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녀는 뭐든 1년 이상은 해봐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모란님, 우리 동호회 총무로 봉사해 주실 수 있나요?
동호회 대표인 차차차님이었다.
-제가요? 자격이 됩니꺼?
-자격 같은 거 없습니다, 성실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모란은 탱고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호회 총무가 되었다. 뿌듯했다. 춤으로 인정을 받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자의 승리감과도 비슷한 기쁨이었다.
시향이 그 소식을 듣고 말했다.
-모란이 니가 총무가 되었다고?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봤제봤제? 내가 무르게 보여도 안글타카이, 이번에는 무라도 잘라볼라고.
-그래, 이번에는 뭐라도 하나 이뤄보자야. 근데 다들 당신보다 젊고 어리다매?
-그게 쫌 걱정이기는 하다. 다들 어리고 예쁜 가스나들 뿐이다이가. 그렇다 케도 내가 매력이 영 없지는 않은갑드라. 춤 신청하는 남자들이 꽤 있거등.
-나 정 시향은 우야든동 우리 모란이가 탱고판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노라.
-나도 그라고 싶네. 근데 뭐든 두고 봐야 알지 않겠나. 시향아, 우리가 미래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뭐가 있드노. 잘 나간다 싶다가도 한순간에 뒤집히는 게 인생 아이드나.
- 갑자기 와그라노. 김 샌다. 재미나게 열심히 해봐라, 가시나야.
총무가 된 모란은 동호회에서 일요일마다 여는 밀롱가 입장료 받는 일을 했다. 블랑카는 일요일 8시 정각이면 어김없이 루시아 밀롱가에 오는 사람이었다. 그 날은 어쩐지 그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난주 있었던 일이 모란의 마음에 걸렸다.
블랑카를 처음 봤던 날도 8시였다. 모란이 탱고를 배우기 시작한 지 2주 차 되던 때, 탱고 스튜디오 건물로 들어섰을 때 한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두 사람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고 그녀가 연습실이 있는 7층을 누르자 남자는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나란히 7층에 내렸다. 8시에 오픈한다던 연습실 문은 닫혀 있었고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내려와서 보니 그녀는 이렇게 쌀쌀한 겨울, 밤거리에 서 있느니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7층으로 다시 올라 온 모란은 층계참 옆 쓰레기 더미에서 나는 악취를 피해 문 옆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낯선 남자 한 명과 조금 전 그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낯선 남자가 문을 열자 문이 열리는 방향의 벽 쪽에 서 있던 그녀가 문과 벽 사이 좁은 공간에 갇혔다. 문을 연 남자는 연습실로 휙 들어가 버렸고, 조금 전 봤던 그 이는 문과 벽 사이에 갇힌 그녀에게 나오라는 눈짓을 했다. 그가 블랑카였다.
모란은 시계를 확인했다. 8시 5분이었다.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마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지금 막 누군가를 떠나보낸 것처럼 그녀는 쓸쓸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