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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취미는 '기대하는 것'

by 뇽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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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된 지 10년이 넘으면

점심 메뉴에 대해 심드렁해지는 건

당연한 순서가 아닌가 싶다.



지나친 일반화일 수 있지만,

'직장인'이라는 글자와

'근무시간으로서의 점심시간'이라는 글자가 어색하게 만나면

쉽게 밋밋해지는 것이 점심 메뉴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1-2학년 담임을 오래 하다 보니

점심밥을 편안하게 먹은 적이

입학식 날 밖에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또 초등학생이던 때부터

초등학교 교사인 지금까지

학교 밥을 먹은 지 햇수로만 25년이 넘어가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급식 메뉴를 알고

급식실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영양 선생님께서 전달해 주시는 급식표를

기계적으로 프린트해서 교실 앞면에 붙여놓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얼마 전 9월의 첫날.



급식표를 새로 인쇄해서 앞면에 붙여뒀는데,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 급식표 앞에 모였다.



내가 깜빡하면

아이들이 와서 이번 달 급식표가 없다고 이야기를 하니

새 달의 새 급식표 붙여두기는

놓치고 싶어도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업무 메신저로 계속 쪽지가 오거나

채점할 것이 쌓여서 내 책상에서만 있었는데,

오랜만에 할 것이 없어 교실을 어슬렁대고 있었다.



뛰는 어린이, 소리 지르는 어린이,

의자 위에 올라가는 어린이들을 진정시키며

제 할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급식표 앞에서 쑥덕이는 어린이들에게 눈이 갔다.



세 네명의 어린이들은

급식표를 두고 진지하게 토론 중이었다.



"오, 설렁탕 맛있겠다!"

"나도 설렁탕 좋아해."

"으, 카레 또 나오네? 카레 진짜 싫어!"

"우와! 소떡소떡도 나온대!"



어린이들은 9월 1일부터 무려 30일까지

빼곡히 찬 급식표의 메뉴를 하나하나 읽고 있었다.



반찬 하나라도,

디저트 하나라도 혹시나 빠질세라

메뉴 하나하나 세심하게 말이다.



이 어린이들을 3월부터 봐왔던 어른으로서,

심지어 이 어린이들에게

<국어> 과목을 가르치는 한 선생으로서,

그동안 본 적 없던, 그 놀라운 집중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렇게 집중할 수 있었다면

진작 수업 시간에...?



절로 떠오르는 꼰대스러운 생각이었다.



이럴 땐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나은 법이었다.



심술궂게 한 마디 보태고 싶은 마음을 애써 접어두고 있는데,

이 어린이들은 하루하루를 손으로 짚으며

좋았다가 낙담했다가 하곤 했다.



같은 메뉴를 보고

어떤 어린이는 환호성을 질렀지만,

어떤 어린이는 실망스러움에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자세히 본 적 없던 급식표를 보며

기뻤다가 아쉬워했다가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반짝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보았던 허지원 심리학과 교수님의 칼럼에 이런 말이 있었다.





기대하세요. 내일의 날씨, 이따가의 점심 메뉴,
오랜만의 시내 외출, 개봉할 영화와 새로운 드라마.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에도 다시 일어나는 힘은,
지치지 않는 기대에서 나옵니다.

오늘 점심으로 먹은 달걀 샌드위치가 형편없었대도,
저녁으로 먹을 소고기 덮밥은 괜찮을 수 있습니다.

이번 학기의 학점이 개판이었대도,
내일 보기로 한 영화는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취미는 '기대하는 것'. 백 번을 실망한대도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 교수 <실패에 우아할 것> 칼럼
전문 링크: https://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1210



<우리의 취미는 '기대하는 것', 백 번을 실망한대도>



얼마 전부터 몇 번을 곱씹던 문장이었다.



아.

기대하는 것이 뭐 별 건가.


매일매일 다가올 것이 급식인디...



그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곧 점심을 먹을 때였다.



잠자코 어린이들을 보고 있다가

급식표를 보느냐 정신없는 어린이들 뒤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오늘 뭐 나온대?"

"된장국이랑 햄이요!"

"맛있겠네."



맛있겠다는 내 말에 다들 이구동성으로

오늘 별로 맛없다는 말이 나온다.



"야, 된장국이면 맛있지."

"맛있긴요!!"



어린이들이랑 아무 의미 없이

된장국이 맛있네, 맛없네로 투닥거리다가

줄 서서 밥 먹으러 갔다.



예상대로 된장국은 간도 적당했고,

해물과 두부를 많이 주셔서 짜릿했다.



내가 끓이면 절대 못 먹을 맛이었다.



다음 날 9월 급식표를 새로 한 장 뽑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는 날에

형광펜을 칠해뒀다.



대부분은 하루에 하나의 메뉴씩은

주황색 형광펜으로 줄이 찍찍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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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무것도 색칠되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30일 중에 하루 이틀이라면

매우 희귀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엄청 엄청 좋아하는 메뉴라서

약간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만 더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밑줄과 함께 별표를 추가했다.



1일부터 30일까지

세심하게 하나하나 메뉴를 들여다보며

정성껏 형광펜으로 급식표의 정점을 찍어주니

묘한 뿌듯함이 몰려왔다.



9월 중 가장 기대되는 날은 17일이었는데,

그냥 돈까스도 아니고

특등심돈까스가 나오는 날이었다.



그 다음 순위는 19일쯤이었는데,

그날은 돼지고기 육전과 파채, 거기다 쫄면까지 나왔다.



그 두 날은 한 11시부터 아이들과

"얘들아, 오늘 '특등심' 돈까스 나온다, 알지?" 하며 설렐 것 같았다.



설사 특등심돈까스가 기대보다 얇고 퍽퍽해도

그 다다음 날 나올 육전을 생각하며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았다.



육전이 좀 질기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파채랑 쫄면을 많이 받아서

같이 먹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또 그다음 주 월요일에는 새우튀김이 나와서

많이 달라고 하면

새우를 한 다섯 마리는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쯤 되니 오늘의 점심 메뉴가 아니라

설사 다른 어떤 것들에 크게 실망을 한다 하더라도

내일 점심 메뉴가 기대되어

조금은 가벼워질 것만 같았다.



우리의 취미는

결국 이렇게 작은 기대에

매일매일 마음을 걸어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몇 번을 더 실망한다 하더라도,

백 번을 더 실망해도

주황색 형광펜으로 칠해진 급식표가

뒤돌면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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