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프리랜서가 되었습니다_8편
문의 및 결제 → 디자인 시안 전달 → 1차 완성본 전달 → 수정사항 반영 → 최종 파일 전달
PPT 의뢰가 들어오면 위와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본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슬라이드 2~3장을 선작업하여 '디자인 시안'이라는 것을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하는데, 전반적인 컨셉을 확인하는 자리이다. 나는 이 단계에서 클라이언트와 결이 맞지 않다고 생각되면 환불을 한 뒤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는다.
무자본 창업을 처음 시작할 때 불만족 시 100% 환불을 해주라는 전략이 여기저기 떠돌던데, 그런 차원의 것은 아니다. 나는 시안을 확인하는 과정이 전체 프로세스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클라이언트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이미지를 적절하게 파악하여 그들이 만족할 수 있을만한 퀄리티로 구현해야 하기 때문.
대다수의 클라이언트는 시안에 만족하고 다음 단계로 진행되지만, 당연히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럼 한 차례 컨셉을 변경하여 시안을 다시 전달하는데, 만약 이때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처음부터 스타일이 맞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이후부터는 또 수정을 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방식은 나에게 절대적으로 손해이다. 이 의뢰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는 가정하에 며칠 간의 일정을 미리 픽스해 두었으며, 또한 최소 하루 이상은 작업을 진행했기에 일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디자인이라는 건 주관적이기에 모두가 나와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생각하며 만든 규정이다. PPT 디자인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 투입된다. 결과물에 큰 기대를 할 수밖에 없는데, 시안부터 불만족해버리면 실망감과 손해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래서 그 손해는 내가 감수하기로 했다.
초반에는 이런 시스템을 악용하면 어쩌나 생각도 들었지만 다행히 여태까지 그런 케이스는 없었다. 그래서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잘 유지해오고 있다. 최상의 결과물을 받아야 하는 클라이언트 그리고 고유한 디자인 스타일을 지키고 싶은 나, 모두를 위한 정책이다.
대기업부터 1인 기업까지 다양한 회사들과 협업을 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투자를 앞둔 스타트업의 IR자료를 만드는 건 나에게 의미가 깊다. 스타트업 출신이기 때문에 그들의 간절함을 잘 알고 있기도 하고, 내가 만들어내는 이 작은 디자인이 그들에게는 큰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리랜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스타트업의 TIPS IR자료를 만들게 되었다. 열정적인 대표님과 직접 컨택하며 예술혼을 불어넣듯 공들여 작업했는데, 이후 합격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기프티콘 선물을 보내주셨다. 처음으로 공유받은 합격 소식이었고,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그때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사실 나는 초반에 IR자료 만드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회사의 개성이 듬뿍 들어가는 소개서와 달리 IR자료는 정적인 스타일이기 때문. 게다가 복잡한 기술이나 설명이 많이 포함되다 보니 도식화를 하기에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래서 IR자료 문의가 들어오면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냥 계속하다 보니 적응이 되었다. 이제는 소개서보다 IR자료가 더 친숙하달까. 내가 디자인한 IR자료로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으면 그렇게 뿌듯할 때가 없다. 이렇게 회사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 할 때면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건 멋진 일이다.
항상 행복하고 뿌듯한 의뢰만 있는 건 아니다. 디자인은 앞서 말했듯 주관적인 영역이기에 아무리 대단한 걸 만들어도 클라이언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이고, 특히나 개인 프리랜서는 평가와 평판이 중요하기에 이게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을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크몽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와중에 한 회사소개서 디자인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시안도 좋아해 주시고 완성본도 좋아해 주셔서 잘 마무리되었구나 생각했는데, 원본 PPT 파일을 전달하자마자 태도가 돌변했다. 갑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떻게 할 거냐는 반응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리숙했던 나는 나쁜 평점을 받을 것이 두려워 결국 환불을 해줬는데, 그때 받았던 상처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던 병아리 프리랜서에게는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런 일 덕분에 더 단단해 지긴 했지만, 어딘가 또 피해를 받는 프리랜서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타까울 뿐이다.
협업이라는 건 원래 어려운 일이다. 회사 내에서 친한 동료와 일하는 것도 어려운데, 외부에서 돈으로 맺어진 외주 관계라면 얼마나 더 복잡하고 어렵겠는가. 그래서 이런 상처에 너무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 디자인을 좋아해 주시는 다른 분들과 일하면서 협업으로 받은 상처를 다시 협업으로 치료했다.
아직 고작 2년 차이지만, 차츰 경력과 포트폴리오가 쌓이면서 내 디자인 스타일을 존중해 주시는 분들이 많이 문의를 주시고 있다. 그러면서 다행히 이런 케이스는 더 만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협업도 디자인도 더 잘할 수 있도록 성숙한 프리랜서가 되는 것이다. 내 디자인을 좋아해 주시는 대다수의 분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