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함 명상 에세이, 21일 루나 디톡스 #1
그림을 배운다. 재작년 겨울엔가, 도서관에서 일러스트 책을 빌려다 끄적거리다 아이패드 드로잉 수업을 온라인으로 듣고, 연필 드로잉과 수채화를 거쳐 유화까지 손대게 되었다. 집에서 유화 2점을 그려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찾아보니 유화 물감은 냄새가 많이 나서, 환기를 시키기 어려운 집에서는 그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집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유화를 배우는데, 옥상에서 그려도 될까요?"
"네, 그럼요." 그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얼마든지 작업하셔도 됩니다."
"정말요?"
"그런데 옥상에 화장실이 없어서."
"그건 괜찮아요."
화장실은 집에도 있지 않은가. 한 층만 올라가면 옥상이고. 예상외로 흔쾌히 허락을 받아 얼떨떨해졌다.
막상 올라가 보니, 바람이 많이 불어 다 그린 유화를 말리기가 여의치 않아 보였다. 높아서 그런가. 날씨는 변덕스러운 친구다. 언제 바람이 불지 모른다. 집에만 있는 것도 아니니, 혹시 그림이 날아가거나 할 경우엔 통제가 불가능하다. 집 관리인도 그 점을 우려스러워했다.
이번엔 동네 이웃에게 전화를 했다. 한 번에 받지 않아서 문자를 남기고, 그 뒤에 답장 대신 전화가 왔다. 그녀는 가게 매장이 막 들여온 식품 냉장고 때문이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한참 그 이야기를 하다, 문자를 보지 못한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동네에 유화를 그릴만한 적당한 공간이 있을지를 물었다. 전에도 동네 관련해선 뭐든 물으면 예상치 못했던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었던 게 기억이 난 것이다.
"저희 집 마당에서 하셔도 되는데."
"정말요?" 한층 더 얼떨떨해졌다.
"이젤도 있을 걸요? 의자도 있고. 화장실도 쓰셔도 돼요."
이럴 수가. 이런 곳이 세상에 있었다니. 우리 집 건물 옥상에도 화장실은 없는데.
"혹시 다 그리고 말릴 곳도 있을까요?"
"그럼요. 가족한텐 치우지 말라고 하면 되니까."
정말이지,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았기 때문이다.
이젤에 놓고 쓸 합판은 없다고 했지만, 그게 대수인가. 물감과 합판을 이고 갑자기 생긴 작업실로 떠났다. 집에선 그릴 수 없으니, 뭐라도 그리고 올 작정이었다. 언덕길을 한참 올라야 있는 주택가였지만, 그쯤이야. 그릴 수 있다는 설렘에 신나게 올라갔다.
이웃이 운영하는 가게 매장에 먼저 들렀다. 마침 브레이크 타임이 시작된 즈음이었다. 집에 가는 동안 그녀가 옆에서 합판을 들어주었다. 지인에게 받았지만 쓸 일이 없다는 접이식 이젤을 꺼내와 2층 마당에 펴주었다. 그녀가 1층 집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첫 유화 습작을 시작했다. 봄이 온 듯하다 다시 추워진 날씨였지만 밖에 있을만했다. 바람도 많이 불지 않았고, 가벼운 이젤이 넘어갈 뻔한 위기도 두어 차례 있었지만 다행히 잘 넘겼다. 학원이나 집에선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항상 음악이 틀어져 있었다. 밖에선 어떤 소리도 다 음악이었다. 철문을 닫는 소리, 골목길 걷는 소리, 두런두런 말소리.
이웃의 브레이크 타임은 세시부터 두 시간이었다. 네시 좀 넘은 시간에 2층으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꿀홍차예요."
그녀가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유화를 그리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고마운데, 따뜻한 차 대접까지.
"어, 감사해요."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세요. 막 딴 대저토마토예요."
이웃이 건넨 천가방 안에는 귀여운 토마토가 무려 네 개나 들어있었다.
직접 키운 농산물이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그 기쁨을 종종 이야기 나누었었다. 이제는 정말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되었다.
가족들을 위한 저녁 준비만으로도 바쁠 텐데, 이렇게 따스하고 푸짐한 선물이라니. 밖이 추울까 봐 내온 차, 나만의 텃밭을 가지는 것이 꿈인 것을 알고 건넨 토마토는 모두 이웃의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듬뿍 받아서 너무 기뻤다. 무겁게 짐을 들고 왔지만, 오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기 전, 합판에서 면천을 떼어내 빨랫줄에 걸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랬지만 튼튼한 빨래집게. 여러 군데 꼭꼭 집었다. 떨어져 이웃과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바람에 날아가 슬퍼지지 않게. 착착 접어 커버 안에 넣은 이젤과, 그림 들고 다닐 때 쓰라고 준 검은 도면 통을 집 앞 테이블 뒤에 세워두었다. 종이 팔레트를 누르기 위해 가져온 묵직한 돌과 함께. 두 번째 그림을 그리러 또 올 거니까 말이다.
필요하면 쓰라던 화장실은 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였다. 집 건물이었다면, 옥상에서 내려와 날아갈지 모르는 그림을 걱정하며 후다닥 다녀와야 했을 것이다.
화장실에서는 옅은 세제 향이 났다. 샤워하거나 빨래한 뒤에 나는 그런 종류의 개운하고 깨끗한 향. 공간은 그 사람의 모습을 일부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지역 문화재단을 통해 만났지만, 정작 이웃의 얼굴을 본 건 이번까지 다섯 번 정도 될까. 유기농 농사를 하는 지인에게 받았다며 커다란 호박을 준 적도 있었다. 텀블러를 넣을 수 있는 작은 가방을 산뜻한 초록실로 떠주기도 했다. 만나지 않을 때도 종종 비건 베이킹 레시피를 문자로 보내주거나 프린트해서 문화재단 담당자 편에 보내주곤 했다.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공간도 물건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 마음이 나는 참 고마웠다. 유독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겪어본 것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마음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 찬찬히 이웃의 행동과 표정,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느꼈기 때문이다.
마당 작업실에서 내려온 뒤에는 이웃의 매장에서 산 김밥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손수 말아 막 기름을 두른 쌩쌩한 김밥이었다.
| 당신을 위한, 당신의 감사함 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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