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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반티카 May 11. 2024

할아버지,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2024 21일 루나 디톡스: 하루를 마무리하는 감사함 명상 에세이 #4



할아버지를 만나러 대전에 다녀왔어요. 대전 가는 기차표는 구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는 인식이 있는데, 며칠 전 조회해 보니 오전 표는 온통 매진이더라고요. 버스표는 많았지만, 혹시라도 막히면 시간에 맞춰 가기 어려워지는 시간대였어요. 다행히 용산에서 서대전으로 가는 기차는 표가 있어서 예매할 수 있었죠. 늦게 일어나면 어쩌나 싶어서, 자기 전에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답니다.


“내일은 5시 15분에 일어날 거야.”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어요. 시계를 보니 5시 12분인 거 있죠? 와! 진짜 신기했어요. 이제 미라클 모닝을 해도 되는 사람이 된 걸까요?


방 청소를 하고, 간단한 아침을 준비해서 챙겼어요. 집에서 5분 정도 늦게 나왔는데, 기차 출발 시간으로부터 딱 5분 여유 시간을 남기고 도착했어요. 마치, 약속한 시간에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모든 것들이 저를 도와주는 것 같았어요. 기차에 앉아서부턴, 긴장이 풀렸는지 엄청 졸렸네요.


할아버지는 몇 년 전 5월에 돌아가셨어요. 오늘처럼 흐린 토요일 새벽에요. 서울 현충원에 자리가 없어, 대전 현충원으로 모시게 되었답니다.



2024년 5월 11일 토요일, 대전 현충원 7묘역의 풍경.


6.25 전쟁에 참전하셨었어요. 전쟁 얘기는 잘하지 않으셨지만, 통역병으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어요. 그 시대에 흔치 않은 유학파였죠. 언어적인 재능이 뛰어나, 여러 나라 말을 아주 잘하셨답니다. 이모와 엄마, 저와 사촌들이 언어를 잘하는 건 할아버지 유전자인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항상 무언가를 읽고, 배우고, 쓰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할 줄 아는 4개 국어를 하는 사람은 집안에선 저뿐인데, 그래서인지 유독 저에게 일본어나 중국어로 말을 걸고, 단어의 유래에 대해 연구한 바를 얘기하시기도 하셨어요.


“유담보가 어디서 온 말인지 아니?”


유담보가 뭔지도 몰랐던 저로선 알 길도 없는 내용이었어요. 알게 뭐예요? 쇼핑하는 게 좋고, 친구들이랑 노는 게 재밌고, 유행하던 노래를 내가 먼저 듣는 게 좋던 나이에.


어쨌든 할아버지가 말하는 유담보는 따뜻한 물주머니를 이르는 말이었어요. 배 아플 때 대는 그 붉은색 고무 주머니 있잖아요. 한국어로 유담보라고 쓰니 한자어 같지? 사실 그 말은 유단포라는 일본어에서 온 거다. 그러니 우리나라 말로 바꿔서 써야 한다, 는 이야기를 하셨던 기억이 나요.


말장난도 치셨어요. 듣는 저는 재미 하나도 없는데, 할이버지만 재밌어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이**이 저기서 오면 저**인가?”


이 씨 성을 가졌다고, 이름 가지고 놀리는 거예요. 이누구, 저누구, 그누구 하면서. 와, 그 고통 아세요? 진짜 재미없는데 할아버지니까 재미없다고는 못하고 어색하게 웃고 있어야 되는 고통?


시간이 지나면서는 할아버지와 그런 이야기를 하며 보내는 시간들이 제게도 재밌어졌어요.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알게 되었거든요.


할아버지와의 선명한 기억의 시작은,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다 퇴직하셨을 때부터예요. 자서전을 한 권 내셨었는데, 1920년대생 일반인이 60대에 자기 이야기를 그렇게 낸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잖아요? 그때는 교육자로서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많았어요.


그게 기억이 나는 이유는, 제가 할아버지 책 원고 교정을 봤기 때문이에요. 엄마가 시켰거든요. 초등학교 1학년이 뭘 안다고, 연필로 교정 부호 써가며 잘도 교정을 봤네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맞게 고친 건지, 맞은 걸 틀리게 만들어놨는지는요. 편집자 분이 알아서 해주셨겠죠.


한 번도 대단한데,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엔 책을 한 권 더 내셨어요. 90세가 넘어도 책을 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아버지를 보면서 했어요. 그래서 저는, 나이 먹는 게 두렵거나 싫지 않아요.


“학자가 될 게 아니면 책은 읽지 마라. 눈 나빠진다.“


대학교 졸업하고 나선 할아버지가 하신 말이 그렇게 와닿더라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요가하고, 인도며 발리를 쏘다녔는지도요.


요즘엔, 할아버지처럼 매일 읽고, 배우고, 쓰고, 말하며 지내요. 언젠가 노안이 오면,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읽기가 힘들어지잖아요?


”뭐가 그렇게 쓸 게 많은지, 맨날 뭐를 쓰고 있어.”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어요. 제가 맨날 뭔가를 쓰는 것도, 할아버지 유전자인가 싶어요. 조그만 노트에 펜으로 끄적끄적. 90세가 넘도록 기억력이 좋고 건강하셨던 건, 그렇게 쓰고 사유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세상과, 여러분과 나누는 모든 것은 할아버지에게 받은 것들이에요. 할아버지를 통해, 할아버지가 낳은 엄마를 통해 태어난 저의 몸. 언어적인 재능. 학습하고 사유하는 습관. 모두 삶을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는 큰 선물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큰 사랑이 되어주셨던 할아버지,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Thank you. We love you very much. We wish you are in peace and joy, wherever you are.



가족 중 큰 감사함을 느끼는 대상이 있으신가요? 그분에 대한 감사함과 사랑을 한껏 느끼고, 마음껏 표현하시는 오늘 밤 보내시기 바라요. 살아계시다면 이왕이면 만나서 직접, 또는 전화나 문자로요.

돌아가셨다면, 그렇더라도 그 분의 사진을 보면서, 또는 눈을 감고 얼굴을 떠올리며 얘기해보세요. 우리의 의식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다 듣고 계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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