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는 우리 반 최고 인기녀였다. 주공아파트, 민영아파트, 한강맨션으로 부의 차별을 두던 동부이촌동에서 나는 주공, 지은이는 한강맨션파였다. 내가 놀이터에서 땅따먹기하고 놀 때, 지은이는 한강맨션에 아이들을 불러 공주 놀이를 했다. 그런 지은이가 어느 날, 나에게 함께 놀자고 한다. 자기 집에 가서 공주 놀이를 하자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10살. 어린 나이였다. 판단이란 걸 잘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였을 것이다. 그저 예쁜 친구가 생겨 좋았다. 늘상 땀을 뻘뻘 흘리고 놀았었는데, 오늘은 고상하게 놀 게 된다는 색다름에도 아마 흥분했을 것이다.
그 아이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 너무 오래 전이라 뭘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늘 하던 고무줄 놀이나 피구는 아니었다. 꽤나 고상하게 예쁜 상점에 가서 아이쇼핑을 했을 거고, 거리를 걸어다녔을 것이다.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헤어질 무렵, 지은이는 나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ooo에게 좀 전해줘. 내일 발렌타인 데이잖아. 일찍 학교가서 책상 서랍에 좀 넣어줘.”
이거였다. 그녀가 나랑 하루 놀아 준 대가. 나는 그녀의 손에 놀아난 것이었다. 상자를 받아 터덕터덕 걸어오는 길, 눈이 아리게 아름다운 노을이 져 갔다. 다시 나는 주공아파트, 나의 영역으로 되돌아왔다.
밤새 고민했다. 일찍 학교에 가서 그 남자 아이의 책상 서랍 안에 상자를 넣어둬야 할 지, 다시 지은이에게 되돌려 줘야 할지. 소심한 나에게 이런 결정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다. 밤이 어찌 가는지 모르는 채로 아침이 와버렸다. 그리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린 치기였을 것이다. 자존심도 살짝 구겨졌을테고. 나는 그 상자를 학교 쓰레기 소각장에 던져 버렸다. 그녀와 눈도 맞추지 않았고, 그녀도 내게 묻지 않았다. 나는 또 나의 땀냄새나는 일상으로 되돌아 갔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한다. 둘이 잘 되었을까? 에이, 그럴리가. 내가 쓰레기 소각장에 그녀의 사랑을 던져 버렸는데? 나 참 못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