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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기획자 장PD May 30. 2024

진짜 공부의 의미

지난주에 우연히 최재천 교수님의 저서 <최재천의 공부>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인생에서 ‘공부’는 어떤 역할을 했고, 그 방법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어릴 때는 공부라고 하면 ‘학교, 시험, 수능’ 이런 관점 외에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나에겐 이런 단어가 내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시험이 끝나면 공부도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수능이 끝나고 나니, 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부가 시작되었다. 공부의 방법이 새로워져야 했다.


공부의 방법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일찍이 깨달았던 것 같지만 그 ‘공부’라는 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 안타깝게도 10대, 20대에는 알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why가 성립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공부가 갖는 의미를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10대, 20대 때 더 열심히, 더 다양한 공부를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럼 나에게 ‘공부’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어떤 의미를 찾았길래 수능이 끝난 지 15년이 훌쩍 지난 30대에 오히려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내 인생에서 공부가 갖는 의미를 정의하기에 앞서 나의 10대와 20대 ‘진짜 공부’와 ‘가짜 공부’는 무엇이었는지 과거 경험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았다.



- 10대 시절의 공부

이 시기에는 학교 공부가 전부였다. 모든 공부의 방법이 내신 성적과 수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가족들은 공부와 크게 관련이 없는 집안이었다. 부모님 두 분은 정규 교육과정을 다 마치지도 못한 채 사회에 나가 육체노동을 통해 돈을 벌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 ‘시험’이라는 것을 치르고, 그 시험을 통해 등수라는 것을 받는 경험을 처음 했는데 그때 받았던 등수는 ‘뒤에서 4등’이라는 숫자였다. 그러나 나도 부모님도 그 숫자에 크게 감흥이 없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공부’가 왜 중요한지 몰랐고,  ‘공부는 여유 있는 집안에서 하는 것이며, 돈은 육체노동을 통해서 버는 것’이라는 관념을 당연시 여겼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 암기의 영역에서 이해의 영역으로

이런 환경에서 어느 순간 내게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 친구들이 학교 공부 외에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공부라는 것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혼자 이방인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단 나도 ‘공부하는 척’이라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공부하는 척’은 암기였다. 공부를 해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일단 내 앞에 놓인 것들을 죽기 살기로 외우기 시작했다. 원래 성적이 바닥이었으니까, 외우기만 해도 성적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 중학교 시절 시험들을 무난하게 치르고,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공부란 ‘암기’였는데, 고1 때 ‘근현대사’과목을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스스로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 ‘왜’라는 질문은 ‘암기’가 아니라 ‘이해’의 영역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가니 내가 알게 된 새로운 지식들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친구가 그리 많지 않아서 집에 아무도 없을 때 투명인간 학생들을 앞에 두고 내가 마치 선생님이 된 것처럼 설명하기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재미’라는 것을 느꼈고, 이 ‘재미’는 근현대사 과목에 한정하여 높은 내신 성적과 모의고사 만점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20대 시절의 공부

처음으로 공부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나에게 꽤 임팩트가 있었는지 대학교 전공도 ‘역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아서, 좁은 선택지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배운 ‘역사’와 대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아예 달랐다. 그렇게 좋아하던 역사라는 과목을 대학생이 되어 가장 싫어하게 된 것이다. 대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내 꿈은 MD인데 도대체 이걸 왜 배우고 있어야 하지?’였다. 자연스럽게 학교 공부와 멀어지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꽤 후회가 되지만,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가도 아르바이트는 열심히 할 것이다. 단지 내가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학교 공부도 충분히 잘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전공 공부가 하기 싫다는 핑계로 알바에만 집중했던 것 태도였다.



돈 받으면 프로다. 프로의 자세를 공부하다.

학교 공부는 실패했지만, 아르바이트를 통해 진짜 공부를 경험했고, 일찍이 ‘프로’의 자세를 훈련할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 하나를 이야기해 보자면, 명절 연휴 시즌에 마트에서 어느 중소기업의 민속주 선물 세트 판촉을 했던 일이다. 본격적인 판촉에 앞서 미리 마트에 가서 내가 판매할 제품과 매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었다. 내 앞뒤 옆에 배상면주가, 국순당, 보해 양조 등 알만한 브랜드의 선물 세트들이 모두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손님이어도 그런 유명한 선물세트를 구매하지 듣보잡 중소 브랜드의 제품엔 손이 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나름 전략을 세워보기로 했다.


일단 경쟁사 제품들과 내가 맡은 제품의 성분을 분석하고, 원산지를 추적했다. 친구는 그렇게 성분까지 분석하는 건 정말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이 과정에서 듣보잡 민속주를 구매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고, 경쟁력 있는 영업 멘트들을 뽑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판매할 제품들이 실제로 진열되어 있는 순서대로 노트에 붙이고, 그걸 계속해서 보고, 외우며 눈으로 익혔다. 이렇게까지 연습한 이유는 내가 손님의 입장에서 제품 구매를 위해 판매 사원에게 뭔가를 질문했을 때, 물건의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하거나 제품의 특성을 바로바로 말하지 못하고 제품 뒷면을 보면서 설명하는 그런 모습을 보았을 때가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아 초짜구나, 이 제품 잘 모르는구나’하는 마음에서 구매의욕이 떨어졌던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손님이 물어보지도 않을 세세한 성분 분석까지 공부를 해가면 그걸 써먹지 않더라도 이미 내 안에서는 ‘내가 이 제품을 제일 잘 알아!’하는 자신감이 만들어진다. 그 자신감은 나의 몸짓과 눈빛과 목소리에서 자연스럽게 뿜어 나오게 되고, 구매의욕의 50%는 여기서 만들어진 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챈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그 쟁쟁한 브랜드 사이에서 듣보잡 선물 세트들을 계약했던 판촉 기간 하루 전에 모두 완판시키고, 오후 일찍 당당하게 퇴근하는 경험을 했다. 


이게 20대에 ‘진짜 공부’했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대학생 시절 내내 알바를 해왔기에 나는 이렇게 주체적으로 일하는 법에 대해 공부했고, 말할 수 있는 사례들이 정말 많다. 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했는지를 물어보면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지만, 알바를 통해 무엇을 공부하고 배웠는지 물어보면 나는 하루 종일 내가 경험했던 썰을 다 풀어낼 수 있을 정도로 그때의 그 경험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나를 찾기 위해서 나를 찾는 법에 대한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지식을 탐구하면서 그 안에서 나를 만들어가자는 거죠.
- 최재천 <최재천의 공부>


10대, 20대를 되돌아보며, 내가 ‘진짜 공부’라고 느꼈던 경험들의 공통점은 위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내가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내 정체성을 만들어간 경험이 나에게 ‘진짜 공부’의 순간이었다.


사회에 진출하기 전까지의 나는 사람의 눈도 못 마주치고, 내 마음속에 있는 가벼운 생각조차도 말하지 못할 만큼 극도로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근현대사를 이해하는게 재밌어서 그걸 친구들에게 설명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발견했고, 시키지도 않은 듣보잡 민속주의 판매 전략을 설계하여, 손님들에게 이걸 왜 구매해야하는지 열을 올리며 설명하고 있는 나의 적극적인 모습들을 발견하며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를 깨우치고,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정리하자면,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일어나는 상황들은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공부하는 태도’를 직접 선택함으로써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바꾸어버리는 경험을 했다.


즉, '진짜 공부'란 내 인생을 내가 만들어가고 있다는 감각이며, '공부의 본질'은 나의 앎의 영토를 넓혀 가며 새로운 내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왜 내가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성장’해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고, 그렇게 스스로 why가 성립되니 이제는 공부를 인생의 기본값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30대의 공부가 너무 재밌다. 이렇게 살면 40대, 50대에 하는 공부들은 얼마나 더 재밌을까? 그 기대감에 한 살 한 살 나이 들어가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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