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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캠핑을 시작했다.

텐트도 없고 테이블도 없었다.

by 유비아네스캠프


매년 연말 즈음이면

아내(=아네스)와 나는 다음 해에 도전할 신년 아이템을 서로 적어내곤 했다. 운동, 다이어트 같이 평범한 것보단 개인사업자를 내본다거나, 주식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본다거나, 가구 부가소득거리를 만들어본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실제로 다 시도했고,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나름 달성률 평가(?)도 해본다. 경영관리, 마케팅 출신 부부의 건강한 가족 사업계획 정도 되겠다.


물론 매번 생산적이진 않았고, 나는 '소비하는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답게 차나 TV를 바꾸자거나, 새로운 취미를 만들자거나 하는 지출 계획을 대차게 내밀곤 했는데 2년 전 그때 불쑥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바로 '캠핑'이다. 십수년 전 한 차례 유행할 즈음, 친구 살림에 따라 가본 적은 있지만 텐트, 테이블, 체어, 침낭, 식기 등 진입장벽이 높아보여 직접 해볼 생각까지 들진 않았고, 결혼 후 아이가 꼬물꼬물 크는 동안은 딱히 떠올린 적도 없었다.


그런데 COVID-19 이후, 해외여행은 커녕 사람 많은 곳도 피하는 시간을 1년 넘게 보내는 동안 '여가 갈증'을 해소할 뭔가가 필요했고, 나이 앞에 바야흐로 '4'가 붙은 해여서인지 자연, 휴식, 힐링 등의 단어에 눈이 갈 무렵 '캠핑'이 마침 머릿속에 두두등장 한 것이다.




"캠핑? 밖에서 잔다고?"

때는 겨울 초입, 패딩을 꺼내는 추위가 찾아들고 있었고 잠버릇 야무진(?) 7살 아들과 위생과 씻는데 예민한 아네스는 '음 그건 좀...'이란 눈빛의 반응을 보였다. 물론 언젠가 제부도 카라반 캠핑을 해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건 다 된 '독채 풀옵션'에 '일회용 숟가락'만 얹고 맛있게 놀다 오면 되는 거였고, 통통거리는 스프링 침대나 수압 낮은 화장실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호화로운 아영이었다.


제부도에 조개를 미리 사간 호방한 저녁상


그런데 내가 다시금 꺼낸 '캠핑'은 맨땅에 사이트를 온전히 꾸려야 하는 본격적인 취미였고, 당시 우리에게 캠핑장비라 부를 것이라곤 몇 년째 트렁크에 굴러다니는 콜맨 폴딩체어 두 개가 전부였다. 텐트도 없고, 테이블도 없고, 침구도 없고, 식기도 없었다.



하지만 그 무렵, 그럴듯한 단어 하나가 인스타그램을 떠돈다.


#캠프닉


"자는 건 아니고 피크닉처럼 오후 잠깐 캠핑처럼 느껴보는 그런 게 있어~"

"차 뒷열을 접으면 평탄화가 되는데 거기 누워서 노을 보고 오는 거지! 어때?"

"일단 캠핑의자 2개랑 간이 낚시의자 있고, 우리 마트 버너 있지? 그걸로 은박지 라면 해 먹으면 되고, 거실에 나무 테이블 그거 접히잖아? 챙기면 되고, 차에 깔 이불패드? 집에 이불 많으니까 그럼 준비 끝이네."


당시 SUV나 기아 레이에 운전석 뒷열부터 트렁크를 잠자리로 만드는 '차박'이 SNS와 매스컴에 자주 등장했는데, 뒤질세라 우리 패밀리카(폭스바겐 골프 해치백) 트렁크를 비우고 뒷열을 접어 나름의 공간감(?)을 손수 증명하고 난 뒤 실패 위험이 적은 캠프닉을 한 번 해보기로 어렵사리 아네스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렇게 정한 캠프닉 장소는

아네스가 검색한 파주의 노을맛집 <율곡습지공원>. 사계절 걷기 좋은 한적한 공원에 입장료도 없는 노지 주차장 차박으로 인기 있는 곳이었다. 집에선 차로 40분, 거리도 가깝고 주말 당일로 다녀오기 좋았다.

(차 뒷열이 접힌단 사실이 나만큼 신나는 아들)
(지금 보니 평탄화 아니고 오르막이다..)

공원 주차장에 들어서자, 차 트렁크에 한 몸처럼 도킹한 차박 텐트나 SUV 위로 웅장하게 올라 탄 루프텐트가 한 자리씩 차지하고 노을을 기다리고 있었고, 난 기가 죽기보단 이 무드에 동참하고 있단 사실이 더 설레게 다가왔다. 들뜬 기분으로 내 작고 소중한 골프 해치백 뒷열을 접어 이불패드를 깔고 신발 벗고 올라누워 트렁크가 딱 열리니,


논두렁뷰가 촤악-


음... 예상했던 느낌은 아닌데 그래도 좋다. 이상하게 좋다. 캠핑장비라 부르기도 민망한 집안 살림으로 챙겨 왔지만 탁 트인 야외에 우리 가족 단독의 공간을 꾸리고 오후 반나절 쉰다는 게 제법 낭만적이었다. 아들은 차에 누워 뒹구는 것도, 평소에 먹기 힘든 라면을 흔쾌히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마냥 신나는 모양이었다.


(OK, 계획대로 되고 있어)


산책하다 만난 커플인데 한적한 공원길에 왜 때문에...?


그렇게 집보다 맛있는 라면을 끓여먹고, 블루투스 스피커에 흐르는 팝송을 흥얼거리고, 공원인지 논두렁인지 모를 길들을 걸으며 로맨틱하게 지는 노을을 감상했다. 참 별것 아닌 것들이 새삼 특별하게 느껴졌다.





뉘엿뉘엿 해가 지자

옆에선 하나 둘 근사한 랜턴이 켜지고, 고기 굽는 소리가 치익거리기 시작했다. 와- 이것이 바로 캠핑장의 저녁 무드인가! 할 무렵, 근데 어? 아 우리 랜턴이 없지.. 넓고 너른 들판에 초겨울 해가 넘어가자 정말이지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졌고 빠르게 체감온도가 내려갔다. 자동차 실내조명은 시동을 켜놔도 5분에 한 번씩 꺼졌고, 점차 서로 얼굴도 안 보일 지경에 가까워지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어둡고 진한 여운과 함께, 멋지게 차박하는 사람들을 남기고 율곡습지공원을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핸들을 움켜쥐며 생각했다. '캠핑, 차박.. 그래 그거 한 번 해보자..!'




그리고 한 달 후,


10개월을 기다린 새 차가 출고되었다. 볼보 V60 크로스컨트리. 고향(거제)을 오갈 편안한 주행감과 반자율 주행, 아들이 뒷좌석에서 운전석을 발로 찰 일 없는 공간감, 19개의 스피커가 들려주는 고퀄리티 B&W 오디오, (나는 볼 일 없지만) 광활한 파노라마 선루프까지 분에 넘치는 패밀리카.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차박이면 차박, 수납이면 수납, 캠핑을 위한 차로 손색이 없다는 사실-



그렇게 난지 한강공원과 강화 나들길로 한 두 번 더 캠프닉 예열을 거치고 바야흐로 우린 캠핑을 시작하기로 했고, 주저 없이 첫 캠핑장을 예약했다. 그리고 그건, 가족 중 나만 들뜬 (하필이면) 한 겨울 첫 캠핑 분투기의 서막이었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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