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생활

by 박민아


카레를 생각하면 배가 부르다. 카레 먹는 데에 적당함이란 없기 때문일까. 급하게 먹어 헛배가 부른 것과 다르게 차곡차곡 배가 불러온다. 카레에 비빈 쌀밥과 함께 넣고 볶은 고기나 감자, 곁들인 김치가 뱃속에서 테트리스 조각처럼 들어있을 것 같다. (카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겠지만) 카레를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심지어 첫 숟가락을 떠 올려 입으로 넣는 순간부터 그렇다. 다 먹을 필요도 없이 말이다.


“카레는 협조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흰옷이나 흰색 테이블과 상극이긴 해도 (카레 물이 드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순식간에 노란 물이 든다) 쌀밥, 고기, 채소, 튀김, 김치, 치즈처럼 다양한 재료들을 한데 모아 카레와 먹어본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치즈가 잔뜩 올라간 카레를 파김치와 먹는 기쁨. 동서양의 조화가 어렵고 대단한 일이 아닌 것만 같다.


국제적인 박애주의가 발동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카레다. 일본 카레, 인도 카레 그리고 한국 스타일의 카레도 다 좋다. 저마다 모두 한가지씩은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메뉴를 고르는 나의 기준은 접근성. 먹고 싶을 때 먹는 카레보다 맛있는 건 없다.


카레에 대해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 보면 쓸데없이 진지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어쩌면 인간 카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특히 거의 매일 누군가와 협화음을 내야 하는 직장인이라면 더더욱. 카레는 혼자의 몸으로 가지와 버섯, 소고기와 크로켓, 깍두기와 치즈를 상대한다. 직장인의 숙명은 카레처럼 협조적이어야 하며, 국제적인 박애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협조적이지 못한 사람과 일하는 것은 괴롭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그런 사람을 피할 요행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가장 슬픈 건 지독하게 비협조적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다. 요청한 일이 있는데 뻔뻔히 모르쇠를 일관하는 사람이나 분명 자신의 몫인데 어떤 황당무계한 이유로든 남에게 일을 미루는 사람. 무례한 언행으로 상대의 마음을 할퀴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일할 때면 당근만 잔뜩 남아있는 기름진 카레를 받아 든 중학생의 마음보다 더 처참해진다. 급식은 남겨도 상관 없지만, 직장인이었던 나는 그럴 수 없다. 누가 먹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게 아무리 싫어도 어떻게 해서든지 내 몫의 카레는 다 먹어야 했다. 나이를 먹었는데도 더 힘이 없었다.


그러나 때로 환상적인 팀워크로 역경을 헤쳐 나가는 일 또한 자주 존재한다. 채찍 같은 날이 계속되어도 맛있는 카레 같은 월급과 사람 때문에 어떻게든 직장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남아있는 재료라고는 토마토와 계란밖에 없을 때에도 근사한 맛을 구현해내는 카레처럼 분명 이건 안될 거라고 믿었던 일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 기름진 카레 정도는 눈 꽉 감고 먹을 수 있다.


해냈다는 쾌감만큼이나, 그 일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기쁜 날도 있다. 세상에는 괜찮은 카레만 있는 건 아니지만 카레라는 건 필요하고, 혹시 완전하지 못한 카레라고 해도 작은 도움을 받는다면 금세 제 몫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카레의 자리에 직장인을 넣어 읽어도 그 뜻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점심 메뉴를 내 마음대로 하게 되었지만 나는 왜인지 이전처럼 카레를 자주 떠올리지 않는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의 나는 왜 그렇게 카레를 먹고 싶어 했을까. 카레 속 커큐민이 뇌에 두려운 기억이 저장되는 것을 막아준다는 뉴욕 시립대의 연구 결과를 읽었다. 말도 안 된다며 웃었지만 어쩌면 아예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가 괜찮은 카레인지 의심하던 날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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