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PTA)이 구원을 다루는 방식 4
PTA는 전기, 중기, 후기의 흐름을 통해, 3종류의 형태로 구원을 포착했다. 그렇다면 최근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다루는 구원은 어떤 모습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PTA가 제시하는 구원의 속성은 후기 작품 <리코리쉬 피자>라는 반환점을 돌아,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구원의 가능성 혹은 확실한 구원의 형태를 제시하던 초기 단계로 말이다.
초기작들을 연상시키는 부분은 단순히 주제의식의 전달 방식만이 아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인물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정체성의 혼란, 혹은 모순'이라는 결핍의 기류가 퍼져있다. 결핍의 정서가 특정 인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은 PTA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매그놀리아>, <부기 나이트>를 연상시킨다. 그 정서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는, 혁명군 ‘프렌치 75’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혁명군의 목표는 현존하는 사회 질서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그 혼돈 속에서 자신들이 바라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필연적으로 질서와 혼돈이라는 두 개념 사이의 끊임없는 대치와 긴장 상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혼돈보다 질서를, 긴장보다는 평온을 갈망하는 존재다. 자유와 혼돈의 가치를 내세우며 시작된 혁명은 점차 질서와 통제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그 사이에서 뒤섞인 채 방향을 잃어버리고 만다. 결국, 혁명은 진압된다. 육아를 시작하며 혁명을 뒤로한 밥, 그리고 정부의 압박 끝에 동료를 배신하는 퍼피디아의 모습과 함께.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있는 것은 비단 혁명군만이 아니다. '스티븐 J. 록조 대위(이하 록조)'로 대변되는 백인 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의 목표는, 혼돈 상태를 야기하는 혁명군을 진압하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백인이라는 계층과 대립하는 흑인 계층에게 매혹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다른 인종과 섞이지 않는 순수한 이상사회를 건국하고 싶었던 그들의 이상은 초기 단계부터 일그러져있었고, 이 균열은 두 인종 사이의 교접으로 인해 태어난 '윌라'라는 인물에 의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윌라는 순수한 사회를 목표로 하던 백인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태어난 인물이며, 혼돈, 자유를 목표로 하던 혁명군에 안정, 통제라는 가치를 들여왔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을 뿐 아니라, 기존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며 등장했다. 그렇기에 윌라는 혁명군과 백인 사회 둘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그녀는 혁명군에게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만든 배신자의 딸이고, 백인 사회에게는 순수성을 위해 제거되어만 하는 대상이다. 결국, 그녀는 영화 내내 한 공간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최종적으로 두 집단이 윌라에게 내리는 결론이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백인 사회의 중심 인물 록조는 끝까지 그녀를 제거하려 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혁명군을 대표하는 밥은 끝내 그녀를 구해낸다. 이들이 맞이하는 결말 또한 크게 갈린다. 영화의 결말에서 구원받는 쪽은 밥과 윌라이고, 록조는 끝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이 결말의 차이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시대가 낳은 모순을 끌어안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자와, 모순을 부정하며 제거하기에 급급한 자. 이 세계의 조물주라 할 수 있는 PTA는 전자에 해당하는 피조물들에게만 구원을 선사한다. 그리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구원받는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이는 PTA 초기작에서 구원에 이르던 인물들의 모습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PTA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왔다. 그가 계속 이 '초기의 흐름'에 머물지, 다시 중기를 거쳐 후기의 흐름까지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의 시각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PTA의 작품들마다 구원은 서로 다른 색깔을 띠고 있다. 물론 그 색깔의 종류는 작품들마다 다르다. 그 색깔들을 한데 모으면, 구원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스펙트럼이 완성된다. PTA의 필모그래피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그 하나하나의 색깔들이 아니라, 전체 스펙트럼의 띠 자체다.
그 스펙트럼의 띠는 우리 각자가 건져 올려야 할 색들을 담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베리를 구원했던 무조건적 수용의 색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프레디가 끝내 붙잡지 못했던 자유와 소속의 모순을 인정하는 색이 필요하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레이놀즈와 알마처럼, 불완전한 채로 서로를 묶어 두는 위험한 사랑의 색이 적합할지도 모른다. 관객들이 해야 할 일은 그 스펙트럼의 띠에서 지금 자신의 삶과 호응하는 색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 색은 잠깐 동안이라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되어줄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구원의 색도 달라진다. 그때 우리는 또 다른 PTA의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PTA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한, 우리는 훨씬 또렷하게 구원을 포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