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한 그루에도 수많은 초록이 들어있다. 잎 한 장조차 저마다의 빛으로, 모양으로, 크기로 살아있다. 어느 잎은 진한 초록으로, 또 어느 잎은 연둣빛으로. 어떤잎은 조그맣게, 다른 잎은 그보다 크게.
색과 크기가 비슷해 보여 드디어 똑같은 잎을 찾았다! 싶었는데, 잎맥이 비웃는다.
한 뿌리에서 돋아난 잎이면서 저마다의 모습인 게 이상하면서도 신기한데, 실은 그 이유 때문에 나무는 균형감 있고 조화롭게 아름답다는 걸 인정하고야 만다.
우리 집에는 여러 종류의 식물이 산다. 마당에도 집 안에도 눈길 닿는 곳엔 크고 작은 식물들이 심겨있다. 처음엔 초록으로 빛나는 모습이 영롱해서, 또 내 주변이 초록으로 예뻐지는 것이 마음에 들어 좋았는데, 이젠 보이지 않는 마음을 나누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려식물과 식물 집사가 되었다고나 할까.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자라고 있는 식물들을 볼 때면 잘 살아내고 있다는 약간의 자긍심 같은 것이 생기곤 했는데, 일상을 가꿀 줄 아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평소 내 바람이 그것으로부터 작게나마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는 식물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다.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오면 난과 화초로 가득 찬 베란다로 곧바로 들어가선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 물도 주고, 식물의 상태도 체크했지만 그 무엇보다 지긋이 바라보는 일을 좋아했다. 그리고 이젠 내가 그 일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잎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바라만 보고 있어도 즐겁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깔로 빛나고 있을까. 볼 때마다 신기했고, 신기해서 계속 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엔 같은 날, 딱 1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가 어김없이 떠올랐다.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 같은 엄마가 주는 밥과 말과 눈빛을 먹으며 동시에 자라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두 아이였으니깐.
잎 하나는 초록이고, 또 다른 잎은 연두로 한 가지에 매달려있는 것처럼 두 아이는 달랐다.
겁 없이 손부터, 몸부터 나가는 첫째와 그런 첫째의 행보를 뒤에서 지켜본 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 때 움직였던 둘째.
같은 음식을 매번 먹음에도 불구하고 입맛도 달랐고.
양보해 주라고 시키지 않았는데도 언제나 양보하는 건 둘째였고, 빼앗는 건 첫째였다. 옷에 관심이 많은 아이와 옷이라면 내복이 최고인 아이.
스킨십이 있어야 잠드는 둘째는 그렇지 않은 첫째 덕에 온전히 아빠, 엄마를 차지하곤 했다.
무수히 다른 점을 지닌 채 살아가는 두 아이를 보면서 같은 배에서 같은 날 나온 애들이 맞나?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다.
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같지 않기 때문에 조화롭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첫째 덕에 둘째는 조금 용감해졌고, 양보하는 일에 개의치 않는 둘째 덕에 첫째 역시 양보하는 법을 배웠다. 얻어온 옷이 한 벌뿐이라도 대체로 괜찮았던 이유는 내복 쟁이가 있기 때문이었고, 어휘력이 좋은 첫째 덕을 둘째가 보곤 했다.
마치 한 나무에 여러 빛깔의 잎이 매달려 있기 때문에 완전히 아름다운 나무가 된 것처럼, 두 아이 각자의 고유함 역시 그러했다.
개별적 존재의 고유함을 볼 때면 움찔한다. 완전히 다른 빛에 놀라고 만다.
그러면서도 경건한 마음이 드는데, 우린 모두 각자의 색으로, 향으로, 빛깔로, 모습으로 살아갈 때라야만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겠구나 싶어 지기 때문이다.
아, 같지 않기 때문에 생명인가 보다 싶은 것.
제 모습으로 자라날 때
완전히, 완벽히 빛날 수 있다.
제 빛이 온전히 있는 아이에게 너는 왜 그 색으로 빛나느냐고 말하는 건,
틀림없는 폭력이 될 터.
같은 색의 잎만 두겠노라 잎을 떼 버리면 휑 한 가지만 남게 될 것이 틀림없는 것처럼,
원하는 모습으로 아이를 키우려고 들 때 각자의 아우라 같은 건 사라지고 시들어 갈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