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피드다. 밤 12시를 기준으로 1분을 두고 외박인 것이냐 아닌 지를 결정하는 빡빡한 부모님 덕분에 마음이 급하다. 이럴 땐 뒷문에서 뛰어 내려서 직접 집까지 뛰는 것이 훨씬 빠른 법! 택시를 타고 정문을 통과하려면, 으레 지나야 하는 차량 통제기 앞에서 또 2분, 모퉁이 도는데 2분이나 걸린다 이 말이다.
가방은 일단 크로스로 단단하게 걸쳐 매고, 운동화 끈도 한번 더 묶었겠다 결국 뒷문 앞에서 택시 문을 박력 있게 열고 나선다. 달리기 전에 시간이나 한번 확인하려 하는데, 놀랠 노자다. 어쩐지 도로에 차가 없다 싶더니 시간은 아직 11시 30분!
"야호!"
게다가 코끝을 살랑 이는 바람도 제법 큰 유혹이다. 룰루 랄라! 어차피 뒷문에서 집까지 걸으면 10분, 뛰면 5분이면 되는 거리니, 전력 질주를 할 마음을 고쳐 먹고는 살랑 부는 바람을 만끽하며 집을 향해 여유롭게 걷는다. 딱히 웃긴 얘기라 할 만한 것도 없는데, 즐거웠던 회식 때문인지 아니면 빠른 속도로 마신 술 때문인지,
것도 아니면 아주 오랜만에 들렀던 노래방에서 목청 높여 불렀던 마지막 노래가 남긴 여운 덕분인지 흥이 오른다. 얼쑤! 절쑤! 지금 이 구역의 흥 부자는 나다 하는 마음으로 불러본다.
"내 피땀 눈물 ~~~!!!"
사실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부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큰 소리로 나와버린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헉'하고는 다시 걷는다. 누가 보거나 듣거나 한 사람은 없겠지 하는 마음에 주변도 '살짝' 둘러보는데 적막하다. 술기운인지 고층 아파트 사이로 고개 내민 달도 너무 귀엽고, 이제 곧 활짝 필 준비에 한창인 철쭉의 몽우리도 반갑다. 집에 가는 길이 원래 이렇게 볼거리가 많았나 싶은 생각에 혼자 고개를 '갸웃' 하고는 혼잣말을 하며 걷는데, 뭔가 느낌이 좀 이상하다. 분명, 아무도 없는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날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괜히 불안한 마음에 이쪽으로도 걸어보고, 저 쪽으로 걸어보는데도 자꾸만 어디서 인지 집요한 시선이 하나 따라와서 붙는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 평소 기민한 위기 레이다를 가진 덕분에 위기 감지 하나에는 예민한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술기운 때문인지 놓친 것 같아 불안하다.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최근 뉴스에서 봤던 길거리 납치 사건이 떠오르며 손에 땀이 찬다. 행여 너무 급하게 달리면,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공격할 까 싶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을 생명줄 삼아 꼭 쥔 채 빠르게 걸으며 동태를 살핀다.
"타닥타닥"
빨라진 발걸음만큼이나 뒤에서 와닿는 시선도 더욱 집요해진다. 발자국 소리도 하나 없이, 시선만 와닿는다. 분명 상큼 발랄한 직장 시트콤이었던 장르가 호러물로 뒤바뀌는 건 순간이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경비 아저씨가 보이는 순간, 마음이 좀 풀리면서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중을 위해서 라도 한 번은 뒤를 돌아서 존재를 확인해야겠다 싶다. 미친 사람처럼 혼자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다가 '꽃이 이쁘다'는 등 안 하던 짓 할 때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며, 바로 몇 분 전의 상황을 후회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려본다.
"......"
숨까지 참으며 고개를 돌렸는데, 고요한 가운데 4개의 눈동자가 묘하게 얽힌다.
"헐......"
여차하면 핸드폰으로라도 때릴 요량이었는지 '꽉' 주고 있던 핸드폰을 잡은 손이 무색할 만큼 고요하던 상대방의 눈동자가 이내 빛나더니,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당황한 건 내 쪽인데, 오히려 뒤돌아선 나를 향해 '움찔' 하더니 뒤로 물러난다.
제 딴 에는 조용한 걸음으로 따라오던 중이었는데, 눈치채고 돌아본 내가 놀랍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는지 시선은 이쪽에 고정시킨 채 뒷걸음질 친다. '그래서 뭐! 네가 뭐 째려보면 어쩔 건데! '하는 마음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잠시 멈칫할 뿐 이쪽도 결코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말로만 듣던 '대치상황' 인가.
"휴"
털뭉치 인지 인형인지 모를 모습으로 짧은 다리로 경계하는 눈빛을 하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터진다. '피식' 웃음도 번지고 만다. 당장이라도 목숨 걸고 한판 하려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꽉 쥐었던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구냐, 넌"
"..."
통성명이라도 하려고 물어보지만, 답이 없다. 조용히 미행한 건 본인인데, 마치 내가 미행이라도 하다가 걸린 것처럼 나를 향해 원망 섞인 눈동자로 집요하게 바라본다. 봄바람에 살랑이는 밤 마실 시간을 방해받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더니, 또다시 발소리도 없이 후문을 나선다.
"어휴, 십 년 감수했네."
식은땀을 털어내며 아파트로 들어서려다 문득 드는 생각 하나. 저렇게 조그맣고 귀여운 친구가 왜 주인 없이 야밤에 마실을 나왔지? 하며, 혹시나 고양이처럼 나를 집사를 간택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시 뒤를 돌아 살피지만 이미 솜털만큼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다음에 또 만나면, 무조건 가방에 납치하고 싶다는 미친 상상을 하며, 혼자 또 '깔깔깔' 하고는 집으로 들어선다. 대치만 안 했어도 12시 전에 올 수 있었을 텐데,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다. 등짝을 자연스레 내밀어 본다. 12시가 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