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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연인과의 이별

38년 만에 맥주를 끊었다


아버지의 술은 말술


  생각해보면 이건 내 잘못이 아닌 거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슬프게도 노동 그리고 술이 전부다.

아버지는 별다른 기술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6남매를 키우던 시골 농부였다. 말이 농부였지 자신만의 땅 한 뙈기 갖지 못한 가난한 화전민이던 아버지는 그 지역에 "동양 최대 다목적 댐"이라는 소양댐이 생기면서 그나마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우리 가족은  춘천으로 강제 이주해야만 했다. 도시로 나오자마자 우리 가족은 곧 도시빈민이 됐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마도 세 살 정도인 듯싶다. 도시로 나온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저녁 무렵 아버지는 노동에 지친 몸을 한잔 막걸리로 때우고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아버지는 죽어라고 일했고 가난했지만 자식들한테는 다정했으며 한 글자라도 더 배워야 한다며 6남매 중에 네 명을 대학을 보냈다. 죽음과도 같은 막노동은 결국 골수암이라는 병을 얻어  병원 침대에 몸을 누운후에야 아버지를 놓아주었다. 아버지는 그제야 쉴 수 있었지만 급성으로 진행된 병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 나이 28세,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처음에는 노동과 시름에 지친 몸을 한 잔 막걸리로 달래던 아버지의 술은 점점 늘어갔다. 많이 마시고 늘 취해있었다. 저녁마다 취해서 들어오신 아버지는 새벽에 엄마가 끓여주는 김칫국에 속을 풀고 또 일하러 나가셨다. 대학교 때 무던히도 아버지 속을 섞이던 나는 밖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집에 들어온 적이 많았다. 새벽일을 나가던 아버지와  마주쳤을 때 말없이 나를 보던  아버지의 그 우울하고 공허한 눈. 그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무덤가에서 지난날을 용서해 달라고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는 다 용서해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은 아직도 내 가슴에 있다. 고단한 인생살이에 막걸리만이 아버지의 위로였을까? 생각해본다.

 아버지 술의 유전자를 세명의 오빠들, 그리고 언니, 남동생  누구도 이어받지 않았고 내가 고스란히 이어받은 모양이다. 물론 나의 술은 말술은 아니다. 아버지 앞에선 명함도 못 내민다.




  



스무 살, 카페 엘리자베스에서 처음 만난 너의 이름은, 생맥주


  

 


 38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 전 2월 말이었으니 아직은 미성년자인 내가 그것도 혼자서 무슨 용기로 그 카페에 들어갔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도 음악을 듣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들어갔을 건데 웨이터가 내민 메뉴판의 생맥주에 눈이 꽂혔다. 생맥주 500cc. cc라는 낯선 단위가 매혹적으로 날 휘어잡았고 나는 용기를 내서 생맥주 500cc를 주문했다. 여자아이 혼자서 맥주를 주문하는 일은 38년 전 그 웨이터에겐 흔한 경험이었을까? 엄청나게 큰 잔에 거품이 가득한 맥주가 담겨 나왔다. 그렇게 처음 마시게 된 생맥주, 그 첫맛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첫맛이 기억이 안 난다니 이상하다.  그걸 다 마시느라 한참이 걸렸다. 다 마시고는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결혼한 언니네 집으로 갔다. 언니가 이상한 눈으로 날 봤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술을 마신 걸 몰랐을까?  맥주 냄새가 났으니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언니는 왜 모른 척을 했을까?  그날 이후  38년 동안을 맥주를 사랑하며 부지런히 마셨다. 운명적으로 헤어질 수 없는 연인처럼 말이다. 초봄부터  초여름까지는 길에서 술 마시기 딱 좋은 계절이다. 종일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다가 해질 무렵에 학교 연못 근처 잔디밭에서 마셨다. 돈이 늘 부족하다 보니 과자 부스러기와 맥주 한 병이 전부 인 날이 많았다. 친구들은 막걸리 나는 맥주, 비싼 술을 마신다고 친구들에게 눈치도 많이 받았다. 그렇게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 같던 남자와 결혼했다. 두 아이를 임신한 중에는 겨우 멈쳤었다. 아이들을 키울 때는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라 내 생애 제일 덜 마시던 시절이었다. 결혼 전에는 취하는 날도 많았으나 결혼 후로는 그 양이 많지는 않았다. 내 할 일은 하고 마시는 맥주이다 보니 누구도 맥주를 끊으라고 하지 않아서 나는 꾸준히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일하면서 시작된 본격 음주 인생





  전업으로 아이만 키우던 나는 45살에 영어공부방을 시작하며 세상으로 나왔다. 열심히 일했고 운도 좋아서 학생들의 숫자가 나날이 늘어 공부방에서 학원으로 확장했다. 학원일이라는 것이 수업 중간에 끼니 찾기가 힘든 일이라 퇴근 무렵에는 피곤함, 배고픔, 고달픔이 물려 온다. 그러면 밥보다는 한잔의 맥주가 간절했다. 직장에서 먼저 퇴근한 남편이 마중 나오는 날이 많았는데 우리는 또 죽이 잘 맞아서 같이 늦은 저녁을 먹으며 맥주를 한잔씩 하곤 했다. 맥주와 함께 밥을 먹으며 배고픔도 잊고 이런저런 학원 운영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풀었다. 아버지가 막노동에 지친 몸과 마음을 막걸리에 의지했듯이 나는 맥주에 풀고 있었다. 물론  생맥주 한두 잔 정도의 술이라 많이 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가 가면서 나이가 들고 한 잔의 술에도 나는 취기가 오르기도 했고 언제부터인가 술을 마시는 게 즐겁지가 않았다. 우리 집 두 아이도 딱히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엄마가 술 한잔을 걸치고 퇴근하는 것에  맘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어김없이 죄책감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몸이 개운하지 않았고 입안에서 풍기는 술냄새가 정말 싫었다.

끊고 싶다, 끊어야지, 그만 마시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었지만 하루 이틀 마시지 않는 것에 성공해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500cc 한 잔인데 뭐 어때라는 생각으로 다시 술잔을 들곤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엔 어김없이 불쾌함이 들었다. 그렇게 또 일 년을 보냈다.








새벽에 글을 쓰고 싶어서

뚝, 맥주와 작별했다.




 몇 개월 전, 15년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를 했다.

멀리 이사한 것은 아니고 4차선 대로를 사이에 두고 한 블록을 옮겼다.

한 블록을 옮겼을 뿐인데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마음이 생겨났다.

전혀 새로운 마음은 아니었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3년 전부터는 블로그를 열고 학원과 영어에 대한 글을 써왔다.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쓰다 보니 이제는 학원 이야기가 아닌 진짜 나의 얘기가 쓰고 싶어 졌다.

내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고삐가 풀린 채 들판에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내 심장을 뛰게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블로그를 쓰고 있으니 나의 이야기를 쓰려면 새벽이 필요했다.

새벽, 누군가에게는 미라클 모닝인 새벽이 내게는 후회로 뒤척이는 괴로운 시간일 뿐이었다. 술은 빠르게 잠들게 하지만 숙면을 방해해서 나는 꼭 새벽에 깨고 피곤이 덜 풀려 뒤척이곤 했다. 새벽을 오롯이 맞이 하려면 금주가 필요했다. 나는 점점 나이 들고 있었고 이제 어쩌면 다시는 내 이야기는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맘이 급해졌다. 선택은 단 하나 술을 끊는 것이었다. 줄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딱 끊어버리기, 그것이었다. 맑은 정신으로 잠들어서 푹 단잠을 자고 눈자위가 뽀득뽀득한 그런 새벽을 맞고 그 새벽에 글을 쓰고 싶었다. 단지 그 이유였지만  사실 끊을 때가 된 것이고 이제 이별할 때가 온 것이었다.

스무 살에 만나서 38년을 같이 사랑했으면 이제 됐다. 더는 아니다. 이젠 너를 보내주고 싶다. 맑고 개운하게 새벽을 맞고 싶다. 나 맥주 끊을 거야, 어느 날 마중을 나온 남편에게 말했고 그래, 남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딱 맥주를 끊었다. 처음 10일 동안은 정말 힘들었다. 퇴근시간이 7시인데 5시부터 맥주 생각이 났다. 생맥주 한 잔인데 뭐, 이 정도는 중독도 아닌데 뭐, 달리 취미도 없는데 맥주라도 마셔야 스트레스가 풀리지, 술을 마셔야 하는 100가지 이유를 대면서 오늘만 마시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퇴근하면서는 다시 맘을 다 잡고  마시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기 싫었다. 보낸 연인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수는 없었다. 이미 내게서 떠나 십리는 더 갔을 그 님을 다시 쫓아가서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버티고 한 달이 가고 100일이 지나고 지금은 반년도 더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가끔 맥주 생각이 난다. 그 거품 가득하고 방울방울 물방울이 맺힌 커다란 잔이 생각난다. 하지만 마시지는 않으리라. 38년 동안의 정든 님이었으니 가끔 맘 속에 생각이야 해 볼 수 있겠지만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맑고 개운하게 맞을  내일 새벽을 기대한다. 그 새벽에 나만의 글을 쓸 것이다.  60이 다 돼 가는 나이에 새벽에 일어나 아침해가 떠오르는 장관을 식탁 끝에서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인생이면 더 무엇이 부러울까? 이 모든 것이 오래된 연인과의 작별 덕분이다. 잘 가라 내 사랑, 참 좋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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