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일상 설계
늦은 저녁의 사무실...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창밖은 어두워졌고, 아직 오늘을 정리하지 못한 채 앉아 있다.
한창 꽃이 만개하는 계절. 학교에 다닐 땐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직장인이 되고 나니 마감이 겹치는 시기라 휴가는 한여름이 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시즌과 비시즌이 분명하다. 프로젝트가 몰려있는 시기에는 주말도 평일같고, 마치는 시간이 들쭉날쭉하다. 하루 내 몇 번의 회의가 이어지고, 모니터를 뚤어져라 보다가 집으로 오는 날, 하루 내 긴장감이 가시지 않아 금방 잠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정이 바쁠수록 뇌는 더 활발히 움직이나 보다. 그날의 체크리스트를 지우고 난 후 집으로 오는 길, 문든 나의 체크리스트도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체력'과 '시간'을 잘 쓰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열심히는 살고 있는데, 영리하게 살고 있는 걸까?
일에서나 가정에서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인생의 중반기. 나뿐만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면 내 또래의 누구나 소용돌이 같은 일상의 굴레와 함께 돌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고, 직장에서는 10년 내외의 경력을 가진 관리자이자 팀원으로 해야 할 일을 쳐내기에도 빠듯하고나 할까. 맡고 있는 책임과 역할이 늘어나니 거기에 투입되는 에너지가 클 수밖에 없다.
에너지는 부족하고 차분히 생각할 시간은 자꾸 뒤로 밀린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맴도는 시기이다.
일과 삶의 균형, 이른바 워라밸은 단순히 퇴근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은 생계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와 성취감, 사회적 역할을 제공하지만 개인이 가진 내면의 욕구까지 다 채워주진 못한다. 그래서 퇴근 이후에, 주말에,휴가에 기대어 각자 자유시간을 보낸다. 어떤 사람은 취미를 즐기고, 어떤 사람은 여행도 하고 또 누군가는 창작을 한다. 나도 그렇다.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나의 시간을 조금 더 충실하게 채워가고자 한다. 열심히만이 아니라, 영리하게 살아야겠다.
워라밸은 일찍 퇴근하는지 아닌지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10년 후에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조언할까?
코칭에서 던지는 질문 중 하나로,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도록 관점을 바꿔주는 질문이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어떤 조언을 줄 수 있을까. 직장 일에만 생산적이고, 나머지 시간은 잠으로 채우면서 지내는 게 맞을까? 현재 내가 가장 바꾸고 싶은 부분은 여기였다. 지금은 그저 주어진 역할에 '열심히' 충실하고 있다면 보다 '영리하게' 살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영리하게 살기, 그 첫째 스텝은 내게 진짜 의미 있는 일을 분별할 줄 아는 것.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모든 걸 다 잘할 순 없으니 선택과 집중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무엇에 시간을 쓸지를 분명히 정하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이고, 그때그때 몸과 마음의 상태를 잘 살피는 단계가 필요하다. 이렇게 쓰다 보니, 영리하게 사는 것이란 '자기 주도성이 높은 생활'이다. 맹목적으로 열심히가 아니라 내 기준에 따라 주도권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주도적으로 몰입한 일은 기획, 또는 창작이다. 머릿속으로 떠오른 것을 아이디어를 풀어내는 활동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재미가 있는 일이었고,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하는 취미를 '일'과 연결시켜 프로젝트로 확장해 나가야겠다는 방향이 잡혔다. 그래서 살짝 움직여보기로 했다. '회사인간'에 한껏 기울어있는 저울에 '창작인간'으로서의 무게를 더해 균형을 맞춰보려 한다.
일상 설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사소한 시도를 정리해 보면
첫째, 매일 감정과 생각을 수집하는 것이다. 하루 10분에서 20분, 연습장에 글을 쓰는 거다. 낙서도 괜찮다. 오늘 느낀 감정이나 생각, 혹은 끌리거나 하고 싶은 것들을 수집한다. 왜 이게 좋았는지, 여기서 어떤 걸 느꼈는지 개인적인 기록이다.
둘째, 개인 채널을 통해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글과 영상에 기반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한편씩 만들어보는 시도를 할 것이다. 브런치 글쓰기와 내 글을 나래이션으로 하는 브이로그, 작은 프로젝트(넷플연가 모임)까지 작은 시도를 꾸준히 해나간다.
셋째, 창작 루틴 만들기. 평일엔 낙서처럼 내가 되고 싶은 모습, 살고 싶은 삶에 대해 쓰고 주말엔 글을 정리한다. 한 달에 한 번은 업로드를 목표로 너무 잘하려 하기보다 흐름을 만들어 나간다.
인생 설계는 언제든 어긋날 수 있지만, 이 정도의 일상 설계라면 충분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삶이지만 방향을 정하고 걷는 일엔 분명한 의미가 있다. 큰 성취가 없더라도 이 방향으로 걷는 과정 자체로 즐거을 테니까. 나를 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시간을 투자해 연구할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