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비는 이제 없다.
굳세어라 영신아! / 정건우
뜬금없는 도로교통 과태료 납부 통지 같은 전화가 왔다. 사촌 여동생에게서다. 시집간 이후 처음이니까 한 9년쯤은 되는 모양이다.
"왜?"
"뭐, 그냥"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해서 전화했다는 것인데, 목소리 끝에 묻어나는 페이소스가 쓴 약 같다. 시집가고 9년이 넘어 아줌마가 다 된 우리 영신이. 불현듯 사촌 오라버니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그 마음이 기특은 하나, 왠지 나는 조금 불안해지는 것이다. 아아, 영신이, 우리 영신이. 한동안 잊고 정신없이 사는 중에도 내 가슴에 반짝이는 별로 남아있는 영신이. 여동생이 없는 나는 내 딴에 끔찍이도 영신이를 위하는 척했다. 나에 대한 호칭도 "우리 큰오빠"로 부르길 강요했고,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그 사실을 확인하곤 했었다.
"내가 누구야?"
"우리 큰오빠"
"내가 누구냐고?"
"우리 큰오빠라니까, 참 내"
살구 먹듯이 오물거리는 그 입술을 보고 있으면 나는 거기서 죽어도 좋았었다.
그런 영신이는 참으로 잘 나가던 여식애였다. 초, 중, 고, 대학을 도무지 2등을 모르고 다녔다. 인물은 사실 내가 봐도 좀 뭐랄까,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성 있게 생겼으므로 "참 독한 년"이란 소리를 무수히 들어왔으리라. 그거야 태생 소관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좌우간, 우리 집안에 드디어 여걸이 탄생했노라며 아버지는 흥분하셨다. 노는 가락이 뭐가 틀려도 틀린다는 것이다. 다른 애들 뼈 빠지게 공부할 때 어디 속초 설악산에 1인용 텐트 하나 둘러메고 바람이라도 쐴 참으로 출타하겠다는 우리 영신이.
"일상적 권태로움에서 일시적 결별을 선언합니다 아"
암! 암! 그렇고 말고다. 굳이 해석이 애매모호한 그녀의 변론을 듣지 않아도 진짜, 우리는 그렇게 알고 믿고 있었다. 그녀의 판단, 선택, 행동은 과연 옳고 특별하며 형이상학적이고 몹시 깊은 철학의 냄새가 물씬한 것이었다.
그런 영신이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녀의 결혼식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며칠 만에 하신 말씀은 "이런 제길, 눈에 콩깍지가 씌었나, 여태껏 헛것을 봤어요. 헛것을 봤다고" 낙담이 동해처럼 깊으셔서 사방으로 물어물어 확인해 본 즉, 양구 읍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벽촌 중 벽촌의 그 두메에서 조그마하게 버섯농사를 짓는 집으로, 그것도 중풍으로 7년째 누우신 시할머니가 살아계시고, 젊은 시부모에 어린 6남매가 있는 집안의 맏며느리 자격으로 시집을 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큰아버지 오셨어요?" 하며 활짝 웃더란다. 전원일기의 고두심처럼 이라나 원. 게다가 작달막한 키의 볼품없는 신랑이 말수도 적었으므로, 온 일가친척 어른들께옵서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득달같은 성화 중에 그만, 아버지는 말없이 와버렸다는 시말이다. "그래도 철학 석사라니까요 형님들" 무안하게 웃으시는 숙부의 웃음을 뒤로하신 채.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세속의 잣대로 영신이의 심리를 인수분해 할 수는 없다. 영신이의 판단, 선택, 행동에 시효기간이란 있을 수 없다. 시할머니 건, 안개 버섯이건, 호미 자루 건, 신랑의 장래에 의심이 가건 말건, 그것은 그녀가 사랑하여 선택한 삶이다. 장날 살림 액세서리들을 사러 사십 리 넘는 읍내로 나오면서, 볼만한 CD 몇 개 비닐로 포장할 우리 영신이의 그 통통한 손등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되돌아오는 그녀, 삶의 발걸음은 고단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단하지 않을 것이다. 고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정말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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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심한 것 같은 애인이 보낸 편지 봉투를 뜯는 심정으로, 나는 혹시 그녀에게 Home sick이 왔나? 하며 두근거렸다. 아차, 드디어 우리 영신에게도 Home sick이 찾아온 것인가? 그 잘 나가던 어느 한때의 추억이 밀물처럼 들어왔나?. 시골살이와 김 서방이 이젠 몸서리나듯 지긋지긋해졌다는 말인가? 나는 갑자기 불안하고 슬퍼지려 하는데,
"김서방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 오라버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뜻밖에도 영신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런 말을 한다. 나는 안도하며 네 신상에 견디기 힘든 다른 문제는 없느냐고 물으니 없단다. 아아, 과연 영신이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언제나, 어디서나, 아르헨티나 북쪽 하늘에 듬성이로 떠있는 별이다. 나는 눈물이 다 나도록 고마워했으나 이내 큰 오라비로서 이성을 되찾고 점잖게,
"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하며 뜸을 들여가며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김서방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는 확실하지 않은 의심을 제공한 죄가 네게도 절반 이상은 있을 것이다. 김서방은 시간 내서 내가 족쳐보면 되는 것이고, 네 죄는 이러하니라"
몸뻬 바지 차림으로 믹스 커피를 맥주잔에 타서 밥숟가락으로 휘휘 저어 evening coffee랍시고 건네준 그 죄가 첫째요, 읍내 버스 정류소에 철부덕 퍼질러 앉아 버스를 기다린 죄가 둘째며, 10% 깎자는 버섯 값을 3% 이상은 죽어도 못 깎는다는 그 말투 죄가 셋째요, 2PM이 해체되었는지, 아니면 다시 뭉쳤는지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그 죄가 넷째며, 시아버지 잡숫고 남긴 비빔밥이 아깝다고 깨끗하게 죄다 먹어치우는 그 죄가 다섯째요, 종일 김매서 피곤하다며 몸뻬 바지 두 번 털고 이내 코 골며 잠자는 그 죄가 여섯째니,
그런 여자 좋아할 남자 강원도에서도 몇 안 된다. 조금 지친 김서방이 그 경계선에서 갈등 중일 것이다. 그런 것이 좀체 고치기 어려운 너의 태생적 한계라는 강변도 될 수는 있겠으나, 이름 석 자 걸어 놓고 나이 더 들기 전에 그 선머슴 같은 말투라도 이참에 한번 바꿔 보려무나. 힘들고 고독하며 낯간지러운 일임엔 틀림없으렷다. 그러나 너니까 할 수 있으니 굳세어라 영신아!
오라비는 이제 없다.
※ 에필로그
1. 김서방을 족친 결과, 동네 다방에서 김서방의 과잉 친절로 빚어진 오해로 판정, 이에 영신이 수긍하여 상황 종료됨.
2. 이후, 영신의 전화 멘트가 좀 상냥해진 듯하였지만 정량적 평가 불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