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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an 05. 2022

뿌리가 꾸는 꿈, 칡꽃

지난 계절 모은 빚깔들 2


  8월은 그늘진 산길도 덥고 습하다. 흘린 땀이 흥건하여 미세한 바람에도 시원해지는 아이러니만 있을 뿐,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 그 절망적인 길에 아카시 봄길을 소환하는 느닷없는 향기가 어디서 슬쩍 흘러나온다면?


  길바닥에 마른 진홍빛 꽃잎이 떨어져 있다. 떨어진 꽃잎을 단서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칡꽃 군락지를 발견하면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칡의 무지막지한 성향과 달리 은은한 향기로 발길을 멈추게 하는 화려한 꽃에 그만 감탄하고 마는 것이다.  감고 올라갈 나무가 없으면 길바닥을 뱀처럼 기기까지 하는 강인한 생명력이 한더위도 무색하게 꽃을 피워낼 수 있는 것일까.  더위에 지지 않으려 맨발로 걸었던 한여름 산길에서 더위에 지지 않은 칡꽃 향은 작은 위로였다.


  아무리 강한 생명도 계절은 이길 수 없어 칡덩굴은 끝까지 버티다 단풍도 없이 초라하게 말라 버린다. 검고 볼품없는 콩꼬투리만 주렁주렁 매단 채 찬란했던 시절은 한여름 꿈처럼 사라지고 숲에 잠든다.


  눈앞에서 잎과 줄기가 세력을 뻗치는 동안   뿌리(갈葛근根) 더했다.  철에 18m까지 자란다니 칼을 들이대지 않고서는 어디에서나 이들을 어찌 말릴 재간은 없어 보인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말린 이가   사람 있었다. 보부상들이  때문에 대관령에서 길을 잃게 되자 강감찬, 고려시대  장군이 칡잎에 무어라고 쓰니 칡덩굴이 침범하지 않았다 한다. 아마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신통력이 있었다는 강감찬 장군을 돋보이게 하려는 신화급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칡은 용맹한 장군의 말에나 귀가 조금 꿈쩍이는, 공생이라는 산림의 질서에는 콧방귀를 뀌는, 무소불위의 콩과의 낙엽성 목본식물이다.


  그 기운찬 생명력은 예로부터 약재, 식품, 생활용품 등 우리 삶에도 들어와 쓸모가 상당히 많았으나 자연에서 많이 벗어난 요즘, 배고픔을 칡뿌리로 해결했다는 구황 역할은 없어지고 건강식품으로 숙취엔 칡즙, 갱년기에 좋은 갈근차 정도다. 그러고 보니 중국집에서 많이 쓰는 갈분 가루도 칡뿌리를 찧어 물에 담가 앙금을 가라앉힌 녹말이었더라.


  아무리 추워도 끈끈한 여름이 전혀 그립진 않지만 칡꽃의 향연으로 그 시기를 위로받은 터라 그것의 정신인 갈근, 차로 겨울날을 또 다독여 본다.

연하게 먹으니 감초처럼 달큰하다. 나무의 맛이다.





정말

    - 임길택


나무나 풀들은

뿌리로 생각하는지도 몰라

어둠 속에서 더

일을 잘하고

갈 곳을 더

잘 찾는지 몰라





* 우리 나무 백가지/ 현암사, 2021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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